지중해를 제압하고 있던 투르크가 키프로스섬을 빼앗자, 1571년 10월 7일 교황 피우스 5세는 돈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지휘하는 베네치아 ·제노바 ·에스파냐의 연합함대로 하여금 코린트만(灣)레판토 앞바다의 알리 파차가 지휘하는 투르크 함대를 공격하게 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 이후 신성 동맹은 일시적으로?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였으며,?로마를 오스만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고, 유럽을 향한 오스만의 팽창을 저지하였다.
이 전투는 15세기부터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지 않았던 오스만 군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혔다. 또한 기독교 세계의 절반에게 레판토 해전은?"기독교의 영원한 적"으로 여겨진 투르크 족의 몰락이라는 염원을 고취시켰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은 그 함선의 거의 대부분과 30,000명의 병사 거의 대부분을 잃었고, 서구 역사가들은 이를 기원전 31년의 악티움 해전이래로 가장 결정적인 해전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1574년 오스만 군은 스페인이 지원하는하프시드 왕조로부터 돈 후안의 군세가 1년 전에 점령한 전략적인 도시인 튀니스를 탈환하였다. 오스만은 오랜 동맹인 프랑스의 도움으로 서부 지중해를 다시 능동적으로 점유하게 되었다.
1579년 페즈 함락은 쉴레이만 대제 때부터 시작된 오스만의 모로코 점령을 완결시켰다. 지브롤터에서 그리스에 이르는 (스페인이 지배하는 무역 도시 오랑과 전략적 거점인 멜리아와 세우타를 제외하고) 전 지중해 해안에 대한 오스만의 힘에 따른 종주권이 완성된 것이다.
오스만의 패배는 지중해에서의 오스만의 확장을 저지시켰고, 서부의 주도권을 유지하였으며, 예전에는 저지할 수 없었던 오스만을 격퇴할 수 있다는 서방의 자신감을 신장시켰다.
오직 노를 젓는 전함들만으로 치러진 이 마지막 중요한 해상 전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결정적인 전투 가운데 하나로 “레판토 전투 이후 세계를 움직이는 추는 다른 쪽으로 흔들리기 시작해, 부유함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해가서,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세계의 패턴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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