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역사

거란족(요나라)은 어디로 갔을까?

frog.ko 2020. 10. 12. 05:14

거란(契丹) 또는 키탄(Khitan)은 몽고계의 한 종족으로 추정되는 거란은 모용연에 의해 격파된 선비족이 우문 · 해 · 거란으로 분리된 4세기 전반부터 사서에 등장한다.  5세기 중엽부터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 거주했다. 언어적이나 문화적으로 볼 땐 몽골계에 가깝다. 

 

자신들이 사용한 명칭은 '키탄'이며, '키타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란식 이름이다. 지금은 사라진 민족이며, 중국의 몽골계로 분류되는 소수민족 중 하나인 다우르족(達斡爾族, Daur)이 거란족의 후예로 추정된다.

 

거란족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북위 때이다. 그들은 몽골 동부를 중심으로 유목 생활을 했다. 당시 거란족은 8개 부락이 독립적으로 활동했고 부족연맹은 결성되지 않았다. 남북조 시대에는 북위와 북제의 공격으로 타격을 입었고, 수나라 대에도 수나라의 공격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당나라 초기에 부족연맹을 결성했으며 측천무후 통치 시기에 당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하고 돌궐에 귀속했다. 돌궐이 쇠퇴하자 다시 당에 귀의했고, 745년에 위구르 제국이 건국되자 100여년 동안 위구르의 통치를 받았다.

840년에 위구르가 망하고 당이 쇠퇴한 틈을 이용하여 대외 팽창을 시작해 북방의 오고(烏古), 실위 등의 부족을 복속시켰고, 중원 지역을 공격해 한족을 포로로 데려와 노예로 삼기도 했다. 10세기 초에 질랄부(迭刺部)의 야율아보기는 많은 한족 출신 부하들을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권위를 창출했고, 906년에 연맹장인 카간(可汗)이 되었다. 그는 다른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카간의 선거제를 폐지해 세습제를 확립했다. 916년에는 황제를 칭하며 거란을 세웠고, 상경임황부를 수도로 하였다.

 

거란족을 통합한 태조 야율아보기는 924년에 서역 정벌에 나서 탕구트와 토욕혼을 굴복시키고, 925년에 발해를 공격해 926년에 멸망시켰다. 태종은 화베이 지역을 엿보다가 936년에 연운십육주를 탈취하고, 국호를 대요로 고쳤다. 태종이 죽은 뒤에 내분이 이어졌지만 성종이 즉위해 정치 안정을 꾀하고 대외 확장을 시도했다.

 

성종은 화베이로 들어가 북송과 대치하다가 1004년에 '전연의 맹'이라는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요는 북송에서 해마다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의 세폐를 받아 재정이 넉넉해졌다. 이 시기에 요는 정치·군사 조직을 정비하고 법전도 공포해 강력한 중앙집권 전제체제를 확립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성종은 국가의 안정을 바탕으로 고려와 여진족을 압박하고 서하를 굴복시켜 중앙아시아의 파미르 고원까지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성종 이후 중국식 체제를 도입하는 문제를 놓고 보수파와 혁신파로 나누어져 정국이 혼미해졌다. 흥종과 도종 때 두 파는 번갈아 집권했고 종실 내부에서도 세력 투쟁을 되풀이했다. 이 와중에 몇 차례 반란이 일어났다. 한편, 여진족을 통일한 아구다는 북송과 동맹을 맺고 요를 공격해 1125년에 요를 멸망시켰다. 그 무렵 요의 일족인 야율대석이 서쪽으로 도망가서 중앙아시아에 요를 다시 세웠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서요라고 한다.

 

종합하면 요나라는 내몽골의 지배 계층으로 요건국 후 일부가 서요를 세웠으나 멸망후 몽골에 흡수된것으로 봐야한다.칭키스칸의 몽골 제국은 순응하는 민족에게 우대하였고 몽골 고원 지대의 여러 부족을 통합했다는 역사적 사실로 보아 만주및 서요의 요나라 민족은 초기에 만주로 후에 여진인 청으로 흡수되었던 것이다.

 

요나라 시대에 몽골과 여진을,몽골제국 시대에는 여진과 요나라가 몽골의 일부였고,청나라에서는 몽고의 일부가 여진이었던 것이다.유목 민족은 거대한 군집 집단이 아니었고 이동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카프카즈처럼 고립된 산악 지역이 아니면지배 민족에 쉽게 동화되는 것이다.흉노,요,몽골,청나라의 세력이 중국의 지배 계층이었지만 살기좋은 한족의 기후및 문화에 의해 쉽게 동화되는 까닭이다.

 

요나라의 흔적은 홍콩의 키타이항공의 이름에서 만 살아있다. 

요 왕조의  붕괴 (1117–1124)
서요(카라 키타이 1124–1218)

 

Khitan-Liao (1025)의 위치

※1218년 서요의 멸망으로 고구려 시대로부터 자그마치 840년이나 이어져 오던 거란의 역사는 13세기에 이르러 그들의 친척인 몽골인들에 의해 영원히 소멸되고 말았다.

 

그러나 13세기 초, 몽골제국이 등장해 금나라를 공격하자, 당시 금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거란족은 몽골과 손잡고 원수인 금나라와 맞서 싸우는 데 앞장섰다. 한 예로 몽골제국이 막 건국된 1206년, 몽골군은 95개의 천호(千戶, 1000명으로 조직된 하나의 부대 단위)를 거느렸는데, 칭기즈칸이 죽던 해인 1227년에는 129개로 늘어나 있었다.

 

거란족이 대거 몽골군에 투항하여 새로운 부대로 편성되면서 몽골군의 수가 그만큼 증가했던 것이다. 또한 칭기즈칸과 오고타이칸을 섬겼던 재상인 야율초재(耶律楚材, 1190~1244)도 몽골군에 항복한 거란족이었다.

 

그는 중국 북부의 농경지를 초원으로 바꾸려던 몽골인들을 설득하여 그 계획을 취소시켰다. 대신 중국인들에 계속 농사를 짓도록 허락하고 정기적인 세금을 거두어 몽골제국의 재정 상황을 안정시켰다. 이렇듯 거란족은 자신들보다 3세기 늦게 발흥한 몽골족에게 대제국 운영의 경험과 지식을 전수해 주었던 것이다.

다우얼족( 達斡 ? 族 ) 은 주로 내몽고( 內蒙古 ) 자치구의 모리다우와 다우얼족 자치구와  근처의 기현( 旗縣 ),  흑룡강성( 黑龍江省 )  치치하얼시( 齊齊哈 ? 市 )  교외지구와 가까운 현에 집중하고 있고, 소수가 신장( 新疆 )  위구르자치구의 타쩡현( 塔城縣 ) 에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