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아(소아시아)의 한구석에서 나온 소군후국으로부터 발전한 이슬람 왕조인 오스만 왕조는 이윽고 동로마 제국 등 남동유럽의 기독교 제국, 맘루크 왕조 등의 서아시아·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 제국을 정복하여 지중해 세계의 과반을 차지하여 세계 제국인 오스만 제국으로 발전하였으나, 18세기 이후 쇠퇴하여 그 영토는 다른 나라에 점령되거나 독립하여 20세기 초반에 마침내 마지막에 남은 영토 아나톨리아로부터 새롭게 건국되어 나온 국민 국가인 터키 공화국이 되었다.
오스만 건국은 13세기 말에 동로마 제국과 룸 술탄국의 국경 지대인 아나톨리아 서북부에 등장한 유목 부족장 오스만 1세가 인솔한 군사 집단이 오스만 제국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이 집단의 성격에 대해서는 유목민 집단이었다는 설이 널리 알려졌지만, 일반적으로는 오스만을 지도자로 하는 무슬림 가지(성역에 종사하는 전사)들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들 오스만 집단은 주변의 기독교 세력이나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영주 및 군사 집단과 싸우기도 하고 손을 잡기도 하면서 점차 영토를 확대해나가, 나중에 오스만 제국으로 발전하게 되는 오스만군후국을 건국했다.
그후 오스만 제국의 제4대 술탄인 바예지드 1세는 젊은 나이에 사방으로 정복을 하여 승리를 거뒀다.
많은 승리에 자신감이 가득 찬 그는 동쪽의 티무르 제국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반격을 받았고, 제국은 티무르의 반격에 의해 멸망 직전까지 갔지만 제10대 군주인 쉴레이만 1세(재위 1520년- 1566년) 때에 이르면 오스만 제국의 국력은 더할 나위 없이 막강해져 능히 다른 나라를 압도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영역은 중앙유럽과 북아프리카에까지 확장되었다.
쉴레이만이 죽은 지 5년 후인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함대는 기독교 세계의 연합 함대에게 패하여 지중해의 패권을 상실했다. 그렇다고 해서 오스만 제국이 유럽 제국보다 열세로 돌아선 것은 아니며, 그 국력은 여전히 강대하였으며 또 지중해의 해상권이 순식간에 오스만 제국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었다. 제국 함대는 패전한 지 반년 만에 동규모의 함대를 재건하여, 1573년에 키프로스 섬을, 다음해에는 튀니스를 획득했다.
1683년까지 슬로베니아와 아드리아 해 연안을 제외한 모든 발칸 반도 지역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18세기부터 힘이 약해졌다. 1699년 헝가리를 잃고, 다음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절대군주로부터의 민주혁명과 각 민족별 독립을 추구하는 세계적인 흐름 선상에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땅을 되찾는 한편, 아랍인을 비롯한 피지배 민족들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1830년에는 그리스가 왕국으로 독립하고,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침략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해 오스만 제국이 마냥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808년에 즉위한 마흐무트 2세는 군대의 서구화를 위해 예니체리를 폐지하고 외무성과 내무성, 재무성을 신설하여 중앙정부의 권력강화를 추진하였다.
1839년, 압뒬메지트 1세는 개혁칙령을 공포한 이후 전면적인 개혁정치를 실행에 옮겼다. 행정에서부터 군사, 문화에 이르기까지 서구적인 체제로의 전향을 도모하는 탄지마트(Tanzimat)가 그것이다. 탄지마트 정책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중앙집권적인 관료기구와 근대적인 군대를 확립함으로써, 서구형 국가로의 전환을 진행시켜 나갔다.
그러나 개혁과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서구 열강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필요했다. 그래서 결국 서구인들의 국내 무역을 더욱 확대하였으며, 제국은 차츰 경제면에서 서구 나라들의 반식민지가 되어갔다. 그결과 제국 경제를 장악한 유럽의 여러 나라에 의한 자본 투하가 진행되어, 유럽의 문화가 빠르게 침투해갔다.
또한 서구의 공업제품과 경합하지 않은 섬유공업 등의 분야에서는 차츰 민족자본이 자라기 시작하고, 전제정치에 저촉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신문이나 잡지의 간행이 확대됨으로써, 훗날의 헌정 부활 이후 민주주의 및 민족주의의 등장을 준비했다.
그래도 비록 죽어가던 제국이었지만, 오스만 제국은 아직 살아있었다. 오스만 제국이 쇠퇴속에서도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정치인들은 물론, 국민들에게 까지 퍼져있었던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국가이다.'라는 생각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생각이 퍼져있는 제국안에서, 이슬람교도들의 최고 지휘자인 칼리프의 권력은 그 이름만으로도 엄청났다.
그런데, 이러한 칼리프직을 제8대 술탄인 셀림 1세이래 계속 술탄이 겸하고 있었으니, 술탄은 칼리프를 겸한 덕분에 제국 내에서의 권위가 더욱 높아졌으며, 이는 왕권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쓰러져가는 제국이었지만, 술탄을 중심으로 모일 수 있었던 덕분이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멸망 이유는 개혁의 실패도, 왕권의 약화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잘못된 선택에 있었다. 1914년 6월,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살해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를 계기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세르비아의 동맹국이었던 러시아 제국이 오스트리아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동맹관계에 따라 전선이 형성되어 전쟁이 일어나니, 이것이 그 유명한 제1차 세계대전이다.
이 때 오스만 제국의 실권은 엔베르 파샤가 잡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당시 상황은 독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삼국 동맹측이 유리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들은 대부분 프랑스, 러시아, 영국 등 삼국 협상측에서 빼앗아간 것들이었다.
엔베르 파샤는 동맹측에 서서 잃었던 영토를 다시 되찾고자 하였다. 또, 당시 오스만 제국에 가장 긴밀했던 국가가 독일이었기도 했다. 그리하여, 엔베르 파샤의 오스만 제국은 불가리아와 함께 그 해 8월 4일에 동맹측에 가담했다.
그러나, 엔베르 파샤의 예상과 달리, 전쟁은 점점 삼국 협상에게 유리해지고 있었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 제국의 국민들마저도 장기전이 싫어서 국가에 반기를 들었다. 그리하여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은 협상국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협상국의 군대가 제국의 심장인 이스탄불및 주요 도시, 항구들을 점령하였다. 제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패전국인 오스만 제국은 협상국들과 조약을 맺는데, 그것은 바로 세브르 조약이었다. 세브르 조약의 내용은 제국에게 매우 가혹하였다.
이즈미르등 여러개의 주요항구들과 여러개의 섬들을 그리스에게 할양해야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유럽쪽의 영토를 크게 좁였는데, 수도인 이스탄불에서 불과 30km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좁은 영토였다.
이 외에도 여러개의 내용들이 있었고, 그것들은 제국의 생존을 위협하였으며, 그들 민족의 생존도 위협했다.
서쪽에서 그리스가 그 옛날의 복수를 하기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술탄이었던 메흐메드 6세(1918~1926)는 열강의 요구에 따르기만 했고, 자기 자리를 지키는데에만 골몰했다.
그 때 케말 무스타파(케말 파샤, 아타튀르크라고도 부른다.)라는 위대한 군인이 등장하게 된다. 그는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 승전국의 일방적인 요구를 거부하고, 세브르 조약의 개정을 주장하였으며, 무능한 술탄정부를 몰아내려고 하였다. 그는 여러가지 불리한 조건 속에서 그리스 군대와열강의 군대에게 맞섰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승리하였으며, 새로 개정한 조약인 로잔 조약을 승전국들과 맺었다. 로잔 조약 덕분에 제국에 잔존하고 있던 그리스군대를 몰아 낼 수 있었다.
로잔 조약을 맺은 케말 무스타파는 메흐메트 6세(재위 1918-1922)가 폐위하여 600년 장수 제국은 해체되었다. 압뒬메지트 2세도 1924년, 칼리프제가 폐지됨에 따라 신정분리의 나라인 터키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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