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의 선조는 칭키스칸의 아랍 원정 때 귀순해온 아랍인의 후손으로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이며 쿠빌라이의 윈난성 개발에 노력했던 사이드 아잘 샴스앗딘 이었다. 정화가 이슬람교도 출신이 었던 것은 나중에 영락제가 대원정을 준비할 때 그 지휘관으로 정화를 맘에 두게 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주원장이 명나라 건국 후 원나라 세력이었던 윈난성을 공격할 때 소년이었던 정화(12세)는 붙잡혀 거세된 뒤 환관이 되어 당시 연왕(燕王)이었던 주체에게 헌상되었다. 주원장 사후 영락제가 제위를 찬탈한 정난의 변(靖難의 變) 때 정화는 공적을 세워, 영락제로부터 정(鄭) 씨란 성을 하사 받고 환관의 최고위직인 태감이 되었다.
정화는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남쪽 바다에 대한 대원정을 준비하여 1405년 6월 제1차 원정을 떠났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전체 길이가 44장(丈; 약 137미터), 폭 18장(약 56미터)이 이르는 대형 선박이 포함된 함선 62척에 총 승무원 2만 7,800명이 탑승했다. 현재의 8천 톤급 선박이며 축구장 크기이다.
콜럼부스의 대서양 항해, 바스코다가마의 인도양 항해 90년 전의 일이다. 소주에서 출발한 함대는 참파(베트남)와 수마트라를 거쳐 팔렘방, 말라카, 실론(스리랑카) 항로를 거쳐 1407년 초쯤 인도 캘커타(Calicut)에 도달했다. 함대의 목적은 항해하여 도착하는 나라에 대하여 명나라에게 조공을 요구하는 일과 남방 지역의 문물 등을 가지고 돌아오는 일이었다. 말라카 해협의 해적 진조의(陳祖義)라는 중국인을 붙잡아 일시 귀국하였다.
이 항해를 통해 명나라와 교류가 없던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차례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1407년 9월 귀국한 정화는 얼마 뒤 재출발 명령을 받아 연말에 제2차 원정을 떠나게 되었다.
항로는 전과 같았지만 이번에는 시암(타이)과 자바 섬 등을 거쳐 캘커타에 도착했다. 귀환 중 스리랑카 섬 가레란 곳에 중국어, 타밀어(현지어), 페르시아어(당시 국제어) 등 3개 국어로 비석(영락7년)을 세웠다. 1409년 여름에 돌아온 정화는 다시 출발 명령을 받고 연말에 제3차 원정을 떠났다.
이번에도 캘리컷에 도달하고 돌아오던 중 스리랑카 섬의 현지 왕이 정화의 배에 실려 있던 보물을 강탈하기 위해 공격했다. 정화가 반격하여 그 왕과 그 가족을 포로로 잡아 1411년 7월에 귀국했다.
3차례 대원정은 거의 같은 항로를 유지했지만, 4번째 원정은 약간 시간을 두어 1413년 겨울에 출발했다.
이번에는 좀 더 서쪽으로 나아갈 생각으로 준비가 더 필요했던 것이다. 캘커타에 도달한 후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해 페르시아 만의 호르무즈와 아라비아 반도 남쪽의 아덴에 도달했으며 귀환 중 수마트라 현지 국왕의 요청을 받아 병사를 움직여 반역자를 토벌하고 1415년 7월에 귀국했다.
5번째 원정은 1417년 겨울에 출발해 본대는 4번째 원정처럼 아덴까지 도달했으나, 도중 나눠진 분대는 아프리카 대륙 동쪽 해안의 마린티(커냐)에까지 도달했다고 전해진다. 1419년 8월에 귀국할 때 사자, 기린, 얼룩말, 낙타, 타조를 가져왔다. 지금의 케냐 탄자니아 고원지대에 사는 포유동물이다.
6번째 원정은 2년 후 1421년 2월에 있었으나, 이번에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조공을 바쳤던 각국의 사절을 돌려보내기 위한 것이 임무였다.
7번째 원정은 영락제의 사후 그의 손자 선덕제(宣德帝)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1431년 12월에 출발하였는데, 이때 정화는 나이가 많아 지휘관 직을 거절하려 했으나 그를 대신할 인재가 없었다. 이번 항해 때 분대는 메카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1433년 7월에 귀국하였지만 얼마 후 정화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캐빈 지멘스는 정화의 선단이 호주와 남극 아메리카까지도 갔다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공인되지는 않았다.
이 대원정은 유럽의 대항해시대보다 70년이나 앞선 대원정이자 대항해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정화 함대는 당초부터 말라카 해협에 건국된 말라카 왕국을 인도양 항해를 위한 근거지로 서 중시하여 말라카 국왕을 우대하였다. 그 때문에 말라카 왕국은 정화 함대의 보호 아래 성장하여 중국 함대의 항해가 단절된 뒤에도 동서교역의 중계항으로서 번영을 누렸다. 이 원정으로 중국인의 남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으며, 동남아시아 각지에서의 화교(華僑)들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정화가 지휘한 명나라 세력이 인도양에 진출한 것은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양 도달보다 80∼90년이나 앞섰으며 콜럼버스 이전에 나온 중국 서적에서 미대륙에만 사는 짐승 그림이며 남미 도처에 정화의 선단의 것으로 보이는 표석들이 보였다는 것이다.아프리카에 도달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지 않지만, 정화의 항해와 관련하여 명백하게 아프리카의 기린으로 보이는 동물의 그림이 남아있고 케냐의 한 부족 가운데는 조상이 중국인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다.DNA조사 결과 정말로 중국인의 DNA가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 동아프리카에 도달했다는 점은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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