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의 구르카족
본래 구르카 족은 네팔의 중부 및 서부 산악지대에 사는 강건(剛健)한 농경민으로 목축도 겸하고 있다. 원주지는 인도 중부였으나, 힌두교도라는 이유로 14세기경 이슬람교도에게 쫓겨 북쪽 네팔로 이동, 그곳의 지배 민족이었던 네와르족(族)을 정복하고 이들과 혼혈(混血)하게 되었다.
고산지대에서 살기 때문에 심폐량이 높으며, 신체능력도 뛰어나다. 스위스와 마찬가지로 매우 우수한 용병으로 유명하다.구르카 용병의 전통은 옛날 영국군이 구르카족이 사는 지방을 침공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복하러 갔다가 큰 피해를 입자, 정복을 포기하고 그곳 출신 자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기 시작한것. 원래 영국은 각지의 식민지에 현지인으로 구성된 외인부대(세포이 같은 부대를 창설해 유지해 왔으나,인도,홍콩,아프리카등 자국 식민지를 독립시켜주는 과정에서 현지인 부대도 대부분 해체했다.
그러나 오직 구르카족 부대만은 해체하지 않은 채 지금도 1개 여단 규모로 존재하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에도 영국군의 일부로 정글등지에서 일본군을 기습하여 큰 손실을 입혔으며 유럽과 아프리카 일부에서도 활약했다.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나라들은 모두 이들을 두려워하게 된다.
영국군의 규모가 많이 축소된 최근에도 여전히 중요한 전투부대중 하나로, 이라크에도 파병중이 다. 더불어 인도군에서도 일부 고용되어 있다.90년대 후반 파키스탄과 국경분쟁에서 이들이 실제로 파키스탄군과 대적한 것도 이름을 날렸다.1767년 네팔전역을 정복하고, 청나라 건륭제의 원정군도 격파해버려 주위에 '오로지 싸우기 위해 존재하는 종족이 있다'라고 소문이 퍼지게 된다.특히 근접전에선 쿠크리를 휘두르는 구르카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이다.
아프리카에선 독일군을 상대로, 동남아시아에선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했다. 독일 병사들의 증언에는 이들이 밤마다 독일군의 진지를 기습해 병사들의 목이나 귀를 베어가는 공포의 존재로 각인되어 있고, 버마의 일본과의 임팔 전투에서 구르카 대대의 디마푸르라는 중사가 일본군 참호로 뛰어들어 무려 24명의 일본군을 베어죽여 빅토리아 무공훈장을 받았다.인도에서는 기차안에서 강도들의 강간과 약탈을 참지 못하고 구르카 용병이 40대 1로 강도들을 학살 및 상해를 가해 어린 소녀를 비롯한 승객들을 지켜낸 실화가 있다.
또한 구르카 연대 소속, 네팔 비마 출신의 딥프라사드 푼 하사(31세)는 2010년 9월 17일, 아프간 헬먼드주 라힘 칼라이 근처의 기지에서 근무중 단독으로 홀로 30여명의 탈레반들을 물리쳤다. 현재도 영국뿐만 아니라 인도,싱기포르에서도 구르카 용병을 선발한다.
▣프랑스의 외인부대
프랑스 외인부대는 프랑스의 육군 소속의 외국인 지원병으로 구성된 정규 부대이다. 1831년 설립된 이후 현대까지 일관되게 존속하고있으먀 외인부대의 상징으로 둥근 모자인 케피불랑이 유명하다.
과거 프랑스의 군주시대 당시 1831년 알제리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소집하는데 유럽과 중동에 흩어져 있던 용병이나 무법자, 범죄자, 탈영병, 망명자, 밀입국자, 소상인 등 각 부류의 인간들이 봉급이 좋은 프랑스 군에 몰려들어 1개 연대를 편성하였다.
이것이 바로 세계용병 특수부대의 대부라 할 수 있으며 프랑스 외인부대의 시초였다. 초창기에 이들은 소모품이나 다름이 없어서 어떠한 형태의 전투건 가리지 않고 투입되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多국적 저질의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떄문에 군대라기 보다는 도적의 무리에 가까웠고 이미지도 매우 않좋았다.
도망병이 속출하여 도망병 방지법이 고안될정도였으며 규율문란과 내부항쟁등으로 괴로움을 당했다.이러한 외인부대가 정치적 작태로 인하여 1835년 스페인에 원조문제로 양도되었는데 대원5,000명중 살아남은 자는 500명에 불과했다.그로 인하여 1835년 12월 새로운 외인부대가 창설된다. 그후 1961년 군부 쿠테타에 의하여 불명예스럽게 외인부대가 해제되었으나 1963년 다시 부활하였다.
외인부대는 프랑스인과 외국인으로 혼성되어 있다. 실제는 과반수 이상이 프랑스인이나 프랑스인의 자격으로는 입대할 수 없어 명분상 벨기에인, 스위스인, 프랑스계 캐나다인이라고 신고한다. 훈련은 외인부대에 입대하게 되면 즉각 별명이 주어지고 그후 3년간은 주어지 별명으로 상호 통하도록 되어있다.먼저 코르시카섬 남단의 보니파쵸에서 1년간 훈련을 받는데 절대복종을 중히 여기며 다음으로 체력이 중요시 된다.장시간의 행군훈련으 다반사이고 73주간에 걸쳐 주2일씩 엄격한 실탄 사격훈련이 실시된다.
신병의 기초훈련이 종료되면 대부분 카스테루노디리의 각종 특기학교로 파송되어 특기훈련과 선발된 일부는 8주간의 고급훈련을 받게 된다.이어서 14주간의 하사관 양성과정을 거치면 하사관으로 임관한다.
현재 외인부대의 병력은 9개 연대 약 8500명이고, 군 복무기간은 5년이며 삼성장군이 지휘한다. 제대하면 프랑스 국적과 공공요금 70%의 할인 혜택이 주어지며 한국인 출신 용병도 다수있다. 한국전에는 1개 대대가 참전하였으며 프랑스의 각 식민지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프랑스 해외파병의 주력으로 활용된다.
◈스위스용병
스위스는 15세기 산업이 발달하지 못하여 유럽에서 꽤나 손꼽히는 가난한 나라였다다. 그런 나라에서 자국민들이 생계를 이어갈 수단은 돈을 받고 다른 나라의 용병이 되는 것이었고, 그로인해 많은 나라의 전쟁에 참가했다.
특히 스위스는 장창을 사용하는 용병을 독점으로 공급하다시피 하였읍니다. 스위스 용병의 용맹함은 13세기말 시작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공격을 막아내면서부터 시작하여 모르가르텐 전투, 라우펜 전투, 젬파르 전투,네펠스 전투, 알베도 전투, 성 야콥 엔 비르스 전투, 모라 전투, 네펠스 전투, 알베도 전투, 성 야콥 엔 비르스 전투, 모라 전투, 마리냐노 전투, 파비아 전투, 카펠전쟁 등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전투에는 항상 스위스 용병이 있었다.
바티칸 스위스용병 전통은 1506년, 교황 율리우스2세가 베드로성당을 개축하면서 스위스에 용병파견을 요청한 데서 시작 되었읍니다.독일황제의 군대가 1527년 교황청을 공격했을 당시 스위스용병 189명 중 147명이 사망하면서 교황 클레멘트 7세의 도피를 도운 일화도 있다.
또 나폴레옹군대가 로마를 침략했을 때 스위스 용병은 1798년 교황 피우스 6세를 위해 용맹하게싸우다 대부분 전사했으며,2차 대전때 히틀러가 로마에 진격했을 때도 죽음으로 바티칸 진입을 막아냈다. 루이 16세의 근위병 역시 스위스인 출신 용병으로, 스위스 용병은 1792년 8월10일 궁전으로 쳐들어온 반란군을 상대로 끝까지 싸우다 이때 26명의 장교와 760명의 사병이 사망하였다.
스위스 용병은17세기~18세기 많은 나라에 고용되었으며 프랑스및 스페인에서 애용했으며 스위스 용병의 구식 전술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된 이유도 있다.
1859년 이후 스위스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단 하나의 용병부대인 바티칸 근위병만을 운용하고 있다. 현재 스위스 용병은 1548년에 제정된 제복을 입고 근무를 하게 되며, 자격은 스위스 캔톤주(독일어사용주) 출신이어야만하고, 키 174이상 19~30세의 나이에 해당하는 용모가 아주 준수한 남자해야 한다. 보수는 숙식제공에 급여는 월 천달러정도입니다.그리고 이들의 구성은 사령관을 포함하여 장교 5명 사병 101명이다.
◈로마 시대의 누미디아 용병
누미디아는 대략 기원전 3세기부터 북아프리카에 존재하던 왕국이다. 나중에 로마의 속주가 되었으며 현재의 알제리와 대체로 일치한다.
로마 당시에는 서쪽으로 마우레타니아(현재 알제리의 서해안) 속주, 동쪽으로 아프리카(현재 튀니지) 속주, 북쪽으로 지중해,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과 경계를 이루는 지역을 말한다.
기원전 6세기경부터 이 지역을 지배한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았고 대부분은 반 유목생활을 하였다. 대체로 이 지역의 말사육이 유명하여 기병을 많이 배출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고 로마의 사주를 받은 서부 누미디아(지금의 모로코)의 왕 시팍스가 카르타고를 침범하자 마시니사는 17살의 나이로 누미디아 기병대를 이끌면서 카르타고의 편에서 시팍스를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마시니사는 누미디아의 기병대를 지휘하면서 히스파니아로 건너가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함께 로마군과 싸웠다. 이후 왕 마시니사가 로마에 투항하여 자마 전투에 기병대를 지원하여 카르타고를 물리치는 데 일조하였고 그 이후 영토를 늘렸다.기원전 46년경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진압당하고 아프리카 노바 속주로 만들었다.
그후에 몇번의 속주 명칭이 변했지만 계속 로마의 속주로 남아있다가 5세기에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를 침공하자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무어인:무어인(Moors)이란 용어는 이슬람계인으로서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에 살았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여왔으며 그들은 아랍계나 베르베르족의 후손들이다. 현재까지도 스페인의 이슬람계인들은 무어인들의 흔적을 닮아 있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무어인이 차지하는 의미란 이슬람계의 공화국(마우레타니아, 모로코, 서사하라, 알제리, 말리 등)에 사는 특정 인종을 지칭한다.오늘날 영어권에서는 Moor라는 표현은 모로코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무어인은 아랍의 안달루시아문명을 창조했고, 그후 11~17세기에 북아프리카에서 피난민으로 정착했다.
※베르베르인
베르베르인들은 나일 계곡 서쪽 북아프리카의 토착 민족이다. 그들은 대서양에서 이집트에 있는 시와 오아시스, 지중해 연안에서 니제르 강까지 불규칙하게 분포한다.
언어는 여러 분파의 베르베르어를 쓰며, 1400만과 2500만 사이 베르베르어 구사자들이 대부분 알제리와 모로코 안에 산다. 유명한 베르베르인으로는 로마의 작가 아풀레이우스, 로마의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성 아우구스티누스,축구선수 지단 등이 있다.
711년 이탈리크의 아랍인과 베르베르 족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 남서부를 정복했다.
※베두인
아랍어로 '바다위(Badawi)', 즉 '사막에 사는 자들'이라는 어원을 가진 베두인족은 주로 아라비아 반도와 이스라엘의 네게브 지방, 이집트 시나이 반도 등 반건조 사막지대에서 생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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