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의 전술
밀집 장창보병대 는 고대 그리스 시민군의 전형적인 부대 형태 또는 그러한 부대를 운용하는 전술을 말한다. 이후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 원정 때에도 이 전술이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시민들은 직접 무장을 준비하여 유사시 중장보병(hoplites)으로 참전했다. 즉, 그리스의 보병은 훈련받은 우수한 병사라기보다는 무장을 갖춘 시민들의 집단이다. 따라서 개개인의 무용이나 현재와 같은 전술적 움직임 대신,시민단 전체의 유기적인 연결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이스식 투구, 흉갑, 정강이받이를 장비하고 왼팔에 묶은 대형의 원형 방패(hoplon)로 내 몸일부와 왼쪽 병사의 몸 일부 를 가려주는 형태로 바짝 다가서붙은 밀집진(phalanx)을 형성하며,드러난 양쪽 날개부분은 소수의 귀족 기병들이 보호 해주게 된다. 그리스인들은 갑옷과 방패, 창으로 무장한 보병들을 호플라이트, 그들이 짜는 밀집 방진을 팔랑크스라고 불리운다.
진과 진이 서로 부딪혀서 먼저 대열이 깨지는 쪽이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그리스 폴리스간의 전투였다.
그리스 밀집진의 위력은 비슷한 훈련도를 가지고 제대로 된 대열을 갖추지 못한 보병대와 싸울때 발휘되었다.
반면 마케도니아인들은 그런 중무장 보병들을 가리켜 페체타이로이라고 불렀고, 그리스인들이 사용하는 창보다 더 긴 창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제국 간의 전쟁에서 지상군의 수효가 충분했을 때 그리스 보병 밀집진을 페르시아군이 돌파한 경우는 없었다.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립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를 발전시켜, 종래 그리 길이가 길지 않았던 창의 길이를 몇배로 늘여 기병돌격에서도 버틸 수 있는장창를 개발하였다.
한편 과거 양쪽 날개의 보호에만 주력하던 기병대를 증강하여 보병 밀집진이 전열을 유지하는 동안 기병을 이용한 우회공격을 하는 망치와 모루 전술로 동방원정에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밀집진형은 기동성이 떨어지며 탁 트인 평지에서만 운용가능하다는 전술적인 경직성을 가지고 있어, 이후 로마의 보다 유연한 군단병이나 우수한 기동성을 가진 궁기병대와의 싸움에서는 한계를 보였다.
긴 창과 중무장으로 인해 기동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고, 결국 기원전 168년 피드나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 5세가 로마군에게 참패하면서 마케도니아의 영광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로마군의 전술
로마 군단(legion)은, 초기에는 그리스의 밀집 장창보병대와 다를 바 없었으나,긴 역사를 통해 다양한 전술을 습득함으로써 근대 이전 가장 강력한 보병집단이 되었다. 카밀루스는 로마군의 중핵인 중장보병대를 3개 대열로 편성하였다.
각 대열은 마니풀루스manipulus로 나뉘어 편성되었다.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는 120명 단위로 총1,200명씩, 최후미이자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는 120명 단위로 총 1,200명씩, 최후미이자 예비대인 트리아리는 60명 단위로 총 600명을 편제하여 한개 군단병력을 3,000명 선에서 유지하였고, 양익에는 300명의 기병대를 나누어 배치된다.군단 총원으로 세지 않는 벨리테스들은 대열 중간에 나뉘어 배치된다.
이후 정복전쟁의 여파로 인해 시민병의 근간인 자영농민층이 붕괴하고 장기간의 원정이 필요해지게되는 시점에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군단의 총원을 6,000명의 군단과 그에 맞먹는보조병(Auxiliarius)으로 구성하였다.
100명으로 구성된 백인대 수의 (Centuria), 여섯개의 백인대가 모여서 만들어진 전술 단위인 대대(Cohort),그리고 10개의 대대로 형성되는 전략단위인 군단(Legion)이 중심이 되며, 보조병 및 기병은 동맹국의 파견 병력으로 편성하게 되었다.
백인대의 장(Centurion)은 병사들과 같은 출신의 노련한 소대지휘관으로,대대장은 선출된 시민 중에서, 군단은 노련한 정치가(전직 집정관 또는 전직 법무관 급)의 지휘를 받았다.
군단의 중핵인 중장보병은 투창(Pilum)과 방패, 히스파니아에서 도입된 근접전에서 사용하는 짧은검(Gladius)으로 무장하였으며 기병,투석병, 공성병은 보조병으로 편성되었다.
로마 군단은 그(백인대 - 대대 - 군단으로 이어지는) 유기적 체제를 이용하여, 다양한 전술적 국면에서 적절한 전투상황을 유도할 수 있었다.중장보병과 맞먹는 수효의 보조병을 운용함으로써 이러한 능력은 극대화되었으며, 공성전이나 방어전에서도 우수한 공병대를 이용하여 많은 전과를 얻을 수 있었다.또한 예비대를 체계적으로 운용함으로써 패배할 때도 참패를 당하는 일이 적었고 승리할 때에도 충분 이상의 전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몽골의 전술
몽고족의 15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군인으로 오늘날로 말하면 국민 개병제이다. 중앙 아시아를 점령하고 징 키스칸이 죽었을때 몽골의 인구가 100만이었다. 그 중에서 전투병력은 13만 이었다고 한다. 13만 명의 군대로 태평양에서 러시아까지 어떻게 정복 전쟁이 가능했을까?
모든 몽골족은 부족간의 전쟁으로 남녀노소 강인한 전사였으며 유목민의 생활을 그대로 전투에 도입했다. 하루에 200㎞를 주파하는 몽골말과 기마술,병참제도가 필요없는 휴대용 건조식품과 역참제도를 활용한 신속한 정보 전달 ,교묘한 심리전인 공포정책과 포용정책이 있다.
이들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요 요인은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궁술이 핵심이었다. 그들은 각자 6마리 정도의 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바꾸어 타면서 재빨리 이동을 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그들은 특유의 집단전법을 취하고 양뿔로 심을 박은 강력한 반궁 ( 半弓 ) 으로 적을 쓰러뜨렸다.
기마병은 말머리 때문에 정면으로 활을 쏘기가 불편하다.그러나 상체를 옆으로 돌려 활을 쏘면 시야가 확 트일 뿐 양 팔을 벌려 마음껏 당길 수 있다.몽골과 격돌한 적이 없는 중앙아시아의 장군들은 후퇴하는 척 하다가 뒤돌아 쏘는 전술에 엄청난 병력 손실을 입었다. 몽골의 활은 마상에서 다루기 쉽지만 위력이 크고 사정거리가 긴 각궁으로 웬만한 완력으로 당기지도 못한다.발사된 화살은 갑옷을 둟고 뼈까지 박힌다.
몽골군은 치고 빠지는 전법 즉,전쟁이 개시되면 후퇴하다가 적의 기동력이 떨어지면 뒤돌아서 적을 사냥하듯 싸웠으며 특히 유럽의 중무장한 기사들은 갑옷의 무게로 인해 기동력이 현저히 떨어져 몽골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몽골이 헝가리를 침입했을때 9천의 몽고군은 10만의 유럽 연합군 기사들을 전멸시켜버린다. 한 마디로 몽골군은 근접전이 아닌 경무장으로 요즘 미국처럼 원격 포격으로 전쟁을 수행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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