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역사

나폴레옹 전쟁이 촉발시킨 근대세계의 변화

frog.ko 2020. 10. 22. 08:14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은 프랑스 제1제국 및 그 동맹국과 영국이 재정 및 군사적으로 주도하는 연합군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전쟁이다. 전쟁은 프랑스 혁명과 그 여파로 일어난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원인이 되어 발발했다.

 

1810년 나폴레옹 제국
빈 체제

나폴레옹 몰락 후 비엔나 회의가 개최되어 유럽의 국경은 새로 그려졌다. 이 전쟁을 통해 대영제국은 팍스 브리타니카를 통해 세계 최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스페인 제국에 맞서 라틴 아메리카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 또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전세계로 확장되었고, 이는 추후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 그리고 그리스의 독립에 영향을 주게 되었. 군사학적인 측면에서도 전쟁을 수행할 당시 급진적으로 새로운 전술과 전투방식이 도입되게 되었다.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대프랑스 동맹의 구축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여, 결정적으로 나폴레옹 전쟁의 승전국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프랑스 중심의 연합 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유럽의 해양강국 중 한 곳으로 발돋움하게 되었으며, 식민지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에 따라 영국에게 있어서 나폴레옹 전쟁은 영국이 승리를 위해 자신의 자본과 자원을 투자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프랑스 항구를 해군으로 봉쇄한 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나서, 영국은 1810년 이후 자바, 모리셔스, 트리니다드, 세인트루시아 등을 점령했고, 실론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했다.

 

또한 1798년 점령된 몰타 섬이 영국에게 반환되었고, 이오니아 섬도 영국에게 할양되었다. 막대한 식민지와 그곳에서 나오는 자원을 바탕으로 영국 경제는 크게 성장할 수 있었고명예 혁명 이후에 정치적인 안정도 보장됨에 따라 영국은 대영제국으로써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또한 이는 영국이 산업혁명의 으뜸 주자로 나서는 데도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한편,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자유주의가 영국에도 영향을 끼쳐 차티스트 운동과 선거법 개정 등이 영국에서 실시되었다.

 

프로이센은 1815년 이후 라인 동맹의 영토 중 상당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강력한 육군이 탄생하게 되었다. 프로이센은 1809년 프랑스의 패배 문제를 다루는 빈 회의에 참석할 권한이 있었다.

 

로이센은 폴란드 분할 당시 얻었던 영토와 그 이전에 확보한 영토를 얻을 수는 없었으나, 작센 왕국의 40%,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의 대부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프로이센의 영토를 엘베 강 너머로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을 대체한 독일 연방에서 프로이센은 맹주가 되었다. 종교적 측면에서 프로이센은 칼뱅파와 루터파, 그리고 기타 신교들을 1817년 통합하였으며이는 독일 종교의 결속력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내부의 움직임 속에서 1848년 혁명이 발생하자, 프로이센은 1848년 프로이센 의회를 설립한다. 로이센은 이러한 원동력을 바탕으로 19세기 후반 유럽의 강국으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독일의 통일을 주도하는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 속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과 주도권을 두고 경쟁하기도 했으며, 덴마크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러시아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일시적으로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었으나, 오스만 제국 및 카자르 왕조와 전쟁을 벌여 동맹을 위태롭게 하기도 했다. 카자르 왕조(이란)와의 전쟁을 통해 오늘날 다게스탄과 조지아 전체와 아제르바이잔의 대부분, 아르메니아 북부 일부분을 점령하여 옛 소련의 국경의 기반을 닦는데 성공했다.

 

한편,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통해 오늘날의 베사라비아 지역을 점령하고 몰다비아 공국을 일시적으로 멸망시켰다이후 러시아 제국은 핀란드 전쟁에서 스웨덴으로부터 핀란드를 할양받았다. 이러한 전쟁들을 통해 러시아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 종전 당시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부적으로는 농노제를 실시하고 있었던 국가였기 때문에 여전히 전근대적인 체제가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는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 해방령으로 완화된다.

 

한편, 러시아 제국은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넓혔으며, 이때부터 남하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오스만 제국과 카자르 왕조, 청나라, 조선 등을 압박해오기 시작한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를 크게 자극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군사적으로 나폴레옹 전쟁 이전에는 유럽은 절대주의 왕국을 중심으로 용병을 고용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을 거친 프랑스군은 혁명의 성과로 공화국을 방어해야 한다는 의식에 타올라 일반 국민을 중심으로 한 국민군으로 바꾸게 되었다.

 

프랑스는 18세기 말부터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나라였기 때문에 징병제도 실시에서 유리하였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의 과정에서 독일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도 국가주의 운동이 높아지면서 전쟁 말기 각국도 국민군의 성격이 강해진다.

 

국민군으로 이루어진 군대의 규모는 계속 확대되었다. 이전 7년 전쟁에서는 20만 명을 넘는 군대를 보유한 나라는 거의 없었다. 한편 프랑스 혁명전쟁 중 최대일 때 프랑스 군인 수는 150만 명에 달했고, 나폴레옹 전쟁 기간 중 프랑스에서 동원된 병력만 300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거기에 산업혁명 초기 단계에 있었기에 병기의 대량생산이 거대한 군대의 무장을 가능하게 했다.

 

전쟁 기간 중 영국은 최대의 무기 생산국이 되어 동맹국에 무기 제공을 실시하였다. 프랑스는 제2위의 무기 생산국이었다. 국민군의 병사들은 강한 애국심을 갖고 있고, 단결력도 있었다. 그들의 도망률은 낮았기에 산병전술에 따른 병사 자율적 판단에 의존한 전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거대화된 군대는 사단이라 불리는 1만 명 정도의 독립 행동이 가능한 작전 단위의 편성이 도입되어, 대부대의 유연한 운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군제 개혁도 프랑스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빨랐다.

 

또한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는 나폴리 국왕으로, 동생 루이는 네덜란드 국왕에 각각 앉히고 스웨덴에 대해서도 프랑스 원수 베르나도트를 왕위 계승자로 파견해 베르나도트는 1818년에 즉위하여 스웨덴 국왕 카14세가 되었다.

17세기 ~ 20세기 프랑스 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