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드 2세는 아버지인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의 뒤를 이어 1865년 왕위에 오른다.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리던 시기였다.
영국·프랑스·스페인 등을 보면서 레오폴드 2세는 식민지만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어줄 거라 생각했다. 즉위 직후 동생인 필리프 왕자에게 보낸 편지에도 그는 “국가는 강하고 번영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를 가져야 한다”고 썼다.
하지만 후발주자가 식민지 삼을만한 나라는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벨기에 의회가 식민지 개척에 시큰둥했습니다. 1831년 중립국 지위로 독립을 선언한 벨기에의 군사력이 바다 건너 식민 영토를 보호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에, 식민지 경영을 무모한 도박이라 여겼다.
레오폴드 2세는 단독으로 식민지 확보에 나선다. 스페인의 이사벨 2세에게 필리핀 양도를 타진했죠. 필리핀을 사기 위해 영국은행에 대출도 신청합니다. 그러나 대출은 거부됐고, 이사벨 2세마저 폐위되면서 계획은 무산된니다.
플랜A가 좌절된 레오폴드 2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콩고이다. 그는 콩고 접수를 위해 ‘국제 아프리카 협회’라는 단체를 설립했습니다. 과학 연구와 인도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콩고 식민화가 본래 목적이었죠. 또 자신을 아프리카에 서구의 기독 문명을 전파하는 박애주의자로 포장하고 국제 학술회의를 개최해 이를 선전한다.
주도면밀하게 의도를 위장한 덕분에 그는 쉽게 콩고를 손에 넣었다. 마침 두 강대국 영국과 프랑스의 충돌을 막아줄 완충지가 필요했던 국제사회의 이해관계도 그를 도왔다.
콩고 지배권을 인정받은 레오폴드 2세는 1885년 공식적으로 콩고자유국가(Congo Free State)를 세우고 본격적인 식민지 개척을 시작했다. 레오폴드 2세의 콩고는 보통의 제국주의 식민지와는 달랐다. 벨기에 정부는 통치에 관여하지 않았고, 그는 개인 자격으로 콩고의 땅과 원주민을 소유했다. 벨기에 면적의 75배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가 역사상 유례없는 사유지가 된 것이다.
그는 벨기에 정부로부터 돈을 빌려가며 콩고 개발에 나섰다. 수탈을 통해 얻은 이익은 당연히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재산이 됐다. ‘콩고 개발업자’나 다름없던 레오폴드 2세는 실제 자신을 ‘소유주(proprietor)’라 불렀다고 한다.
첫 수탈 대상은 상아였다. 그러나 상아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은 기대에 못 미쳤다. 때마침 고무 타이어를 사용한 자전거가 발명됐고, 자동차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고무 수요가 폭증하면서 국토 절반을 고무나무가 덮고 있던 콩고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다.
그는 원주민을 모조리 고무 생산에 투입한다. 밀림에서 맨몸으로 고무를 채취하는 일은 그야말로 사람을 갈아 넣는 노동입니다. 레오폴드 2세는 주저하는 원주민을 밀림으로 밀어 넣기 위해 악랄한 수법을 동원했다. 원주민의 아내나 딸을 감금해놓고 고무를 가져오면 풀어주겠다고 협박하는가 하면, 강제노동을 거부하는 마을은 몰살시켰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손목을 잘라낸 잔혹한 행위는 특히 악명 높았는데, 손이 절단된 뭉툭한 팔목을 가진 원주민들의 모습이 레오폴드 2세의 폭정을 상징하는 대표 이미지가 됐을 정도다.
그는 고무 할당량을 맞추지 못하면 목숨으로 갚도록 했고, 이들을 처형하는 용병에게는 총알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걸 시신에서 잘라낸 손으로 증명하도록 했다. 총알이 빗맞는 등 실수를 했을 때, 용병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손목을 자르기 시작했다. 잘라낸 손이 용병들의 성과로 평가되면서, 바구니 가득 잘린 손을 담아 다녔다는 목격담이 나오기도 했다.
인정사정없는 착취와 수탈, 극악무도한 살육으로 콩고는 지옥이 됐다.
이렇게 콩고를 착취해서 레오폴드 2세는 막대한 수익을 올린다. 1998년 역사저술가인 아담 호크실드가 펴낸 『레오폴드 왕의 유령(King Leopold's Ghost)』을 소개한 뉴욕타임스(NYT) 기사는 레오폴드 2세가 거둔 수익이 2억 2000만 프랑, 현재 가치로 11억 달러(약 1조 1000억원)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호크실드의 책에 따르면 레오폴드 2세는 수익 일부를 아끼던 정부(情婦) 캐롤라인에게 저택과 값비싼 드레스를 사주는 데 사용했습니다.
또 제국을 꿈꾼 군주답게 과시적인 건축사업에 몰두했습니다. 어찌나 건물을 지어댔는지 ‘건축왕’이란 별명을 얻었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히틀러에 맞먹는 학살자로 역사에 기록됐는데도 벨기에에선 그에 대한 평가가 썩 나쁘지 않습니다. ‘건축왕’ 덕분에 벨기에는 19세기 아르누보의 중심지가 됐을 뿐 아니라, 대대손손 자랑할만한 아름다운 유산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어쨌든 극악무도한 행위는 곧 선교사 등을 통해 콩고 밖으로도 알려지게 됐다. 레오폴드 2세를 향한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이 일었습니다. 훨씬 거대한 식민지를 착취·수탈한 영국 등 제국주의 열강조차 레오폴드 2세의 잔혹성에 혀를 내두르며 비난에 가세했다. 마크 트웨인과 코넌 도일 등 유명 인사들도 나섰다.
사태를 방관하던 벨기에 정부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콩고를 식민지로 병합하기로 결정합니다. 1908년 마침내 콩고자유국가는 사라졌다.
레오폴드 2세가 콩고를 지배한 기간은 20년 남짓이다. 그 기간 콩고에서 약 1000만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공식 통계가 없어 이는 역산한 수치다.
각종 기록을 종합하면 1885~1908년 콩고 인구의 절반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는데,1924년 최초로 실시된 인구조사 결과 콩고 인구가 약 1000만 명으로 집계됐다는 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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