킵차크 칸국이란 몽골 제국이 분열된 이후에 설립된 4대 칸국 가운데 하나이다.
표제어인 킵차크 칸국은 몽골이 튀르크와 함께 이 곳에 오기 전 이전 이 지역을 지배하던 중세 튀르크계 민족인 킵차크인에서 따온 것이다.
킵차크인들이 살게 된 이후 이 지역을 킵차크 초원이라고 불렀으므로 몽골인들이 세운 왕국 역시 킵차크 칸국이라고 부른 것이다. 금장 칸국(the Golden Horde, 金帳汗國, )이라는 이름이 더 널리 쓰이는데, 이는 킵차크 칸국이 망하고 난 후인 16세기에 러시아인들이 몽골인들의 황금 천막에 붙인 별명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부르는 킵차크 칸국이나 금장 칸국(the Golden Horde)이란 명칭은 당시 몽골인들이 사용한 명칭이 아닌 외부 세계에서 호칭한 것에 불과하다. 킵차크 칸국과 다른 칸국들의 몽골인 지배층들은 왕조의 창립자인 바투 칸이 칭기스 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주치인 울루스(주치 씨족의 영지)라고 불렀다.
몽골인들이 왕족으로 최고 계급이었고 튀르크계들이 관료나 상인등으로 중간계급으로 나머지 슬라브인들을 지배하였다. 국교는 건국 초기부터 피지배계층인 슬라브인들의 정교회를 배제하고 튀르크인들의 수니파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였고 몽골인들도 이슬람화하였다. 오늘날 러시아의 타타르스탄 공화국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등 튀르크어족 킵차크어파 국가들의 전신이 된 나라이다.
킵차크 칸국의 기반을 이룬 주치와 바투의 군대는 몽골인이 적고 튀르크인 지배자들이 많았다. 특히 타타르인들의 조상인 튀르크계 킵차크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러시아인들이 킵차크 칸국과 그 후계 국가를 타타르라고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획득한 영지도 원래 킵차크인의 거주지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초기부터 튀르크족의 영향을 짙게 받아 몽골과 튀르크의 문화가 섞였다.
국가 초기부터 지배자였던 튀르크들이 믿고 있던 이슬람을 몽골인들이 받아들이고, 우즈베크 칸이 즉위한 이후로는 사실상 튀르크족의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칸의 후예답게 기존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에 매우 관대하였다.
심지어 우즈베크 칸은 교황으로부터 관대한 기독교 정책에 대한 감사편지를 받았고 우즈베크 칸 또한 교황에게 답신을 보냈다. 그의 아들 자니베크 칸이 정교회의 모스크바 대주교를 불러 자기 아내의 병을 치료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킵차크 칸국은 루스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공국들을 칸국의 속국으로 편입하였다. 루스인들은 일정 부분 자치를 인정 받은 대가로 종주국인 킵차크 칸국에게 의무적으로 공물을 납부해야 했으며, 칸이 요구하면 군대까지 지원해야 했다. 이렇게 1240년부터 1480년까지 칸국의 지배를 받은 기간을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몽골-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른다. 원나라를 비롯한 다른 칸국들과 달리 킵차크 칸국은 루스인들과 동일한 지역에 거주하지도 않고 동화되지도 않았기에 정복 이후에도 루스인과 몽골인은 문화적으로 철저하게 구분되었다.
킵차크의 칸들은 루스의 효과적인 지배를 위해 루스 도시 지배자들과의 알력을 이용하였다. 이 중 가장 충실한 심복은 모스크바 대공으로 이반 1세부터 본격적인 대공의 지위를 받아 징세관 역할을 수행하였다.
때로 모스크바 대공들은 자신들과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도시들이 칸을 섬기지 않는다며 칸에게 밀고했고 그때마다 킵차크 칸들은 징벌 원정을 통해 도시들을 황폐화시키고 종주권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모스크바 대공이 칸에게 호출당했다가 사형 선고를 받고 사망하기도 했다.
몽골족은 모스크바 공국의 대공이던 이반1세를 킵자크 한국의 세금 관리인으로 임명했고 이반은 킵차크 칸국이 요구한것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고 이반은 남은 돈으로 국력을 키우고 땅을 사들여 한적한 시골에 불과한 모스크바 대공국은 러시아 제일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킵차크 칸국은 흑사병의 유행과 더불어 우즈베크 칸의 후계자 자니베크 칸이 1357년 암살당하면서 삐끗하기 시작했으며, 마마이 칸 재위 시절에 벌어진 쿨리코보 전투(1380)에서 모스크바 공작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이끄는 러시아 제후 연합군에게 패전하면서 체면을 구겼다.
모스크바 공국에서 승전 결과를 과장해서 퍼트리자 킵차크 칸국에 조공을 바치던 루테니아 일대 공국들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 결국 패배한 마마이 칸은 처형되고, 킵차크 칸국에 조공을 바치던 동유럽 내 여러 공국들이 당시 상승일로에 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 쪽으로 붙어버렸다. 그 뒤를 이은 토크타미쉬 칸이 즉위하여 모스크바를 털면서 간신히 체면을 세웠고 러시아에 대한 종주권은 다시 인정받았지만, 과거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동맹 관계에 있던 티무르 제국이 손에 넣은 페르시아를 탐내 타브리즈를 약탈한 것을 계기로 동맹은 결렬됐고, 여기저기에서 티무르에게 갈리다가 결국 수도 사라이 베르케까지 털렸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티무르 제국으로 끌려간 것을 계기로 킵차크 칸국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다.
킵차크 칸국이 전통적으로 일 칸국의 영토를 자기 것으로 주장해온 것을 감안하면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인간흉기 티무르에게 도전한 대가는 실로 가혹했다. 킵차크 칸국의 권위는 와해되고 영내 여러 부족과 토후들이 독립하기 시작했다.
이후 칸에서 쫒겨난 토크타미쉬는 예전부터 킵차크 칸국과 키예프 루스 등 우크라이나 일대를 놓고 경쟁해오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망명해서, 비타우타스(Vytautas) 대공과 함께 킵차크 칸국을 공격했다. 리투아니아의 팽창은 1399년 보르스클라 강 대전투에서 리투아니아군이 궤멸되면서 멈췄지만, 이미 킵차크는 리투아니아에게 우크라이나의 거의 대부분을 빼앗겼고 리투아니아의 흑해 진출을 허용했다.
이후 주치의 첫째 아들 오르다의 후손과 토크타미쉬의 자손들이 번갈아 각축을 벌이며 킵차크 칸국은 소리 없이 무너져 갔다. 결국 15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카잔 칸국, 크림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우즈베크 칸국, 카자흐 칸국으로 분리되면서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였다. 이 칸국들이 떨어져가고 남은 킵차크 칸국을 이흐 칸국이라고도 한다.
마침내 아흐메트 칸 재위시절인 1480년 러시아 제후국들을 하나씩 통합하고 있던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가 크림 칸국과 제휴하여 종주권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240년에 달하는 몽골-타타르의 지배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아흐메트 칸은 이를 응징하기 위해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고 모스크바 대공국 및 크림 칸국을 압박하였지만, 아흐메트 칸이 사망하고 그 아들이 물려받은 시기에는 모스크바와 크림 칸국의 공세에 밀리게 되어 결국 1502년 크림 칸국과 모스크바 공국에게 정복당한다.
이후 이반뇌제(이반3세)는 타타르와의 예속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여, 통일되고 독립된 러시아의 국가를 완성시켰다. 더불어 이반 3세가 카잔칸국을 멸망시키자 카잔칸국과 인접한 몽골계국가인 시비르 칸국은 이반뇌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시비르칸국을 무너트린 러시아는 코자크족을 주축으로 강을 따라 이동하면서 요새를 건설했다.
또한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인 조에 팔라이올로기나와 혼인하면서 교황청으로부터 제3의 로마라는 명예를 받게 되었다. 이후 스스로를 독립국가의 수장인 차르라 선포하여 모든 러시아령의 군주임을 선언하였다.
▣킵차크 칸국의 계승 국가
백장 칸국:이흐 칸국(→루스 차르국→모스크바 대공국)·아스트라한 칸국 (→루스 차르국)· 카잔 칸국(→ 루스 차르국)· 크림 칸국(→러시아 제국) · 카심 칸국(→루스 차르국)
청장 칸국:노가이 칸국(→ 러시아 제국)· 시비르 칸국( → 러시아 제국)· 우즈베크 칸국(→ 티무르 제국→부하라 소비에트 인민공화국)· 카자흐 칸국(→카자흐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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