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제국은 1871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했던 국가이다. 독일 지역에서 근대 국민국가를 탄생시킴으로써 현대 독일의 모태가 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의 독일의 통일로 성립되어, 장기 19세기 말의 대표적인 강대국이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제정이 붕괴하고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도이체스 라이히라는 명칭은 이 때부터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바이마르 공화국 및 나치 독일에서도 쓰였다. 나치 독일의 영향으로 독일 제국을 제2제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연방의 형태로서 4 왕국, 6 대공국, 5 공국, 7 후국, 3 자유시 및 "엘자스-로트링겐 제국령"(Reichsland Elsaß-Lothringen)으로 이루어졌으나 프로이센 왕국이 제국 면적의 3/5를, 인구의 2/3을 차지하였다.
19세기, 39개의 군소국가로 분리되어 있던 상황에 1834년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관세 동맹이 결성됨으로써 경제통일의 기반을 시작으로 촉진되었다. 관세동맹으로 독일안의 국가들이 서로 무역할 때 부과되었던 번거로운 관세들이 폐지되었기에 독일경제는 이전과 비교도 안 될정도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관세동맹은 독일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 셈이었다.
이어서 통일의 기운은 1848년 프랑스의 2월 혁명으로 다시 한 번 영향을 받았는데,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자 그 영향으로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가 열리고, 이곳에서 로베르트 블룸같은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하여 자유주의적 평화통일 방안이 논의되었으나,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내의 보수파(융커계층)에 의해 실패하였다. 자유주의적인 연방통일을 주장했던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가 끝내 좌절된 이후, 독일의 정치적 통일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1862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 왕국의 재상이 되었다. 그는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력한 군사력과 군비증강을 주장하여 이른바 "철혈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제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덴마크와 전쟁을 벌인 결과(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 프로이센의 승리로 덴마크 북부지방의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점령하였다.
1866년에는, 산업과 군사력이 증강한 프로이센이 이를 바탕으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일으켜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을 격파하고 북독일 연방을 결성, 오스트리아 제국을 독일 연방에서 추방했다. 이로써 신성로마제국 이후 독일의 핵심 세력이었던 오스트리아가 배제된 소독일주의의 형태로 통일이 진행된다.
1870년에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인솔하는 프랑스를 크게 물리치고, 나폴레옹 3세를 포로를 잡는 등 승승장구하여 파리에 입성,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후들에게 추대되는 형태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독일 제국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독일 제국이 성립했다. 또한, 이 때에 오랜 세월동안 프랑스와 영유권을 두고 다투었던 엘자스-로트링겐 지방을 베르사유 궁전에서 맺은 조약을 통해 획득했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사이에서 긴장이 높아가던중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자 청년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라예보 사건). 이를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자 발칸반도에 남하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 제국은 세르비아 지원을 선언한 뒤 총동원령을 내렸고, 이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국이었던 독일제국은 러시아 제국, 프랑스, 벨기에, 대영제국에 선전포고, 공격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1918년 11월 9일 독일 킬 군항에서의 수병들 반란을 시작으로 시민들이 합세하여 독일 11월 혁명으로 비화하자, 결국 11월 10일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하면서 제정이 무너졌고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혁명은 성공하였다. 이후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정부수반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이라고 불리는 공화제 정부가 세워졌다.
1918년 11월, 독일 임시정부는 협상국(영국, 프랑스,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은 종전을 맞이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하여 포젠과 서프로이센은 폴란드에 할양되었고, 알자스와 로렌 지방은 프랑스에, 북슐레스비히는 덴마크에 할양해야만 하였다.
거기에 남양 군도와 칭다오는 일본에, 아프리카 식민지는 대영 제국, 프랑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벨기에 등에게 할양하였고 전쟁 도발 배상금인 1320억 마르크까지 지불해야 했다. 게다가 라인란트지역은 프랑스 중심의 연합군에 의해 비무장화 되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이 시작한 것이 아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시작했고, 전쟁 기간 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인과 유대인을 주로 학살했다는 점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독일 제국보다 더 많은 배상을 내야 했었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국토 손실이 심했던 것과는 비교하면 독일이나 불가리아 왕국은 본토 손실이 상대적으로 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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