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2년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그리스는 발칸 반도 및 아나톨리아 전역의 모든 그리스 민족의 통일과 고대 그리스와 동로마 제국 영토의 회복을 주창하는 이념인 메갈리이데아(Μεγάλη Ιδέα)를 국시로 삼고 그리스인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확장해 나가는 정책을 펼쳤다.
이후 80여 년에 걸쳐서 테살리아, 마케도니아, 크레타, 동부 에게해 제도 등을 야금야금 빼앗아오던 그리스에게 드디어 갈리 이데아를 현실화할 둘도 없는 기회가 생겼는데 바로 숙적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해 패전국이 되고 그리스는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승전국이 된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면서 그리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제외한 유럽 터키 전역과 스미르나 일대를 할양받아 아나톨리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조약 결과 오스만 제국은 반병신 상태가 되었고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슬라브족 다수 지역을 먹었으니 관심이 없을 것이고 알바니아는 아나톨리아를 수복한 뒤 곧 따먹을 약소국일 뿐이며 불가리아는 패전국이라 할 말이 없으니 자신들을 막을 나라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 그리스는 내친김에 최종 목표인 옛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아나톨리아를 수복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
지금이야 국력으로는 그리스가 터키에게 상대가 안 되지만 당시 세브르 조약으로 아나톨리아만 남게 된 1919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인구는 고작 1,463만 명이고 당시 그리스 인구가 757만 명으로 오스만 영토 일대에 거주하는 그리스인 인구가 200만 명에서 250만 명 사이였다. 터키군이 19세기 시절 무기를 사용하는 군용기 하나 없는 구식 군대인 반면 그리스군은 대전 당시 연합군의 지원으로 현대화가 그럭저럭 완료된 상태였으니 그리스 입장에서도 한 번 해 볼만한 도박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반대로 그리스인 무슬림, 무슬림 롬인, 포막, 차머리아 알바니아인, 메글레나 루마니아인을 비롯한 터키인 등 50만명이 그리스에서 추방되었다.
이 때 인종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언어도 혈통도 아닌 종교적 요소만을 고려하였다. 하지만 종교를 통한 구분 역시 현실 사회상과 일치하지 않았다. 1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리스인과 터키인들 간의 상호 통혼과 문화적 교류는 굉장히 깊었고, 따라서 동네는 이오안니나, 테살로니키 같은 그리스 영토에 살며 그리스어를 쓰면서도 종교는 무슬림이고, 반대로 사는 곳은 아나톨리아이고, 언어도 터키어를 쓰지만 종교는 정교회인 경우도 엄청나게 많았다.
이에 대해 종교 하나만으로 터키인, 그리스인으로 선을 그어 하루아침에 그 동네에서 수 백년간 뿌리 내려 살던 사람들은 '외국인'으로 규정하고 추방했다.
그리스군은 아나톨리아를 갈라먹으려는 연합군과 함께 오합지졸 터키군을 박살내고 터키 대국민회의 소재지인 앙카라 근교까지 진격하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한 먼치킨이 규합한 터키군에 의해 서 모두 실패하고 만다. 결국에 그리스는 스미르나를 비롯한 아나톨리아의 거점과 콘스탄티노폴리스 근교의 동부 트라키아를 잃고 에게 해에 있는 대부분의 섬을 보전하는 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리스-터키 전쟁이 1922년에 끝나고, 두 국가는 스위스 로잔에서 로잔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은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두 국가가 그리스인은 그리스로, 터키인은 터키로 추방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터키 정부는 그리스인들을 자기 땅에서 보기가 싫었고, 개발지에 정착시킬 인구가 필요했다. 그리스 정부도 나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923년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은 최초의 대규모 인구 교환 조치로, 20세기에 있었던 상호간 합의를 통한 인구 추방 조치이기도 하다. 인구 교환 대상자는 약 2백만 여명에 달하였다. 대상 인구의 수는 50만 여명에 이르며, 또 협정이 체결되기 전에 터키군에 이미 쫓겨난 그리스 인구가 100만이 넘었다.
반대로 그리스인 무슬림, 무슬림 롬인, 포막, 차머리아 알바니아인, 메글레나 루마니아인을 비롯한 터키인 등 50만명이 그리스에서 추방되었다.
이 때 인종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언어도 혈통도 아닌 종교적 요소만을 고려하였다. 하지만 종교를 통한 구분 역시 현실의 사회상과 일치하지 않았다. 1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리스인과터키인들 간의 상호 통혼과 문화적 교류는 굉장히 깊었고, 따라서 동네는 이오안니나, 테살로니키 같은 그리스 영토에 살며 그리스어를 쓰면서도 종교는 무슬림이고, 반대로 사는 곳은 아나톨리아이고, 언어도 터키어를 쓰지만 종교는 정교회인 경우도 엄청나게 많았다. 이에 대해 종교 하나만으로 터키인, 그리스인으로 선을 그어 하루아침에 그 동네에서 수 백년간 뿌리 내려 살던 사람들은 '외국인'으로 규정하고 추방했다.
이러한 이유로 양국은 우리와 일본처럼 앙숙관계로 있다. 또한 마케도니아인,아로메니아인,불가리아인집시,터키인등 소수민족이 거주한다.
이러한 이유로 양국은 우리와 일본처럼 앙숙관계로 있다. 또한 마케도니아인,아로메니아인,불가리아인집시,,터키인등 소수민족이 거주한다.
알려지지 않은 사실(아나톨리아 내 그리스계 터키인들의 행보)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군에는 튀르크인이나 아랍인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 국적의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불가리아인 등도 있었다. 탄지마트 개혁 이후 실시된 근대적 징병제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에 차이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며 개중에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날때까지도, 심지어 종전 이후 오스만 제국군이 해체될때까지도 오스만군에 군적을 두고 있던 그리스계 장교 및 병사들도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군이 이즈미르와 그 주변을 점거한 이후인 1920년 4월 29일에 내려진 그리스군 점령지역내 32세 미만의 모든 남성에 대한 동원령이 내려졌을때 그리스군의 징집령에 응해 그리스군으로 갈아탄 이들도 있었지만 전우와 총을 맞대고 싶지 않아서, 혹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터키 대국민회의군과 함께해 그리스군과 싸운 이들도 있었다.
이에 맞서서 터키 대국민의회측도 1920년 9월 13일에 볼루, 게이베, 에르투으룰, 에스키셰히르, 퀴타햐, 아피욘-카라히사르, 데니즐리, 부르두르, 으스파르타 도 내에 거주하는 20-40세 사이의 비무슬림 남성에 대해 예외없이 비전선지역으로의 이주령을 내렸으며 대부분은 앙카라로 이주시켰다.
하지만 에스키셰히르와 빌레직에 거주하던 그리스계 비무슬림들은 현지 무슬림 튀르크인들과의 사이가 매우 좋았고 그리스군에 참가하기 싫어서 그리스 점령지역에서 도망친 그리스계 주민들도 이쪽으로 많이 이주했기 때문에 이 두 지역의 그리스계 주민들은 이주령에서 제외되었다.
한편 이에 관해 1921년 8월 25일자 인민의 자유 신문에서는 "이즈미르의 룸인(그리스계 터키인)들 사이에서 군대 문제 때문에 걱정하고 있다. 많은 룸인들이 네덜란드 영사관으로 가서 본인이 오스만 제국 국적임을 증언하고 군대징집을 면하고있다." 라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또한 사카리야 전투 당시 포로로 잡힌 그리스군 제49보병연대 소속 병사는 본인을 포함한 연대병력 절대다수가 아나톨리아 룸인들이며 다들 탈영을 원했지만 15-20일만 버티면 된다는 지휘관의 말을 믿고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리스계 터키인과 튀르크계 터키인 간의 인간적인 협력도 있어서 그리스군이 퀴타햐를 점령했을 때 현지의 룸인 들은 튀르크인 이웃들을 보호하기 위해 튀르크인의 가게 간판에 즉석으로 그리스어를 써서 붙여주었고 이렇게 해서 튀르크인들을 그리스군의 약탈로부터 보호하기도 했다.
에디르네에서는 현지 룸인들이 튀르크인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고 그리스군이 강제로 튀르크인 이웃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룸인 들이 거부해서 그리스군으로부터 학살당하는 사건도 있었고, 현재는 이스탄불에 속하는 차탈자 지역에서는 룸인들의 동네에 거주하는 파즐의 아들 요르기는 그리스군에 의해 체포되어 반죽음이 될때까지 구타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사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이름인 파즐이 무슬림들이 붙이는 이름이라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아들 이름인 요르기는 그리스어로 하면 요르요스인데, 그리스에서 가장 흔한 남성이름이다.
그리스군의 철군 이후에도 튀르크인과 그리스인의 인간적인 우호관계에 대한 수 많은 증언이 존재한다.
이러한 사실과 증언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당시의 본토 그리스인들과 아나톨리아의 룸인 들은 서로 동족으로 여기고 그리스에 협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조상 대대로 알고 지내던 무슬림 이웃들과의 평화와 고향을 지키기 위한 이들도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을 서로 적으로 만들고 서로를 학살하게 만든 이 전쟁은 민족주의가 초래한 비극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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