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는 중국과 인도의 사이에 위치해 있으나 히말라야 산맥과 티베트 고원에 둘러싸여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히말라야 산맥의 북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역의 평균 고도가 4900m가 넘어,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컬어진다.
티베트는 지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고립된 지역이다. 티벳이 역사에 기록된 시기는 7세기초에 남리루쩬(囊日論贊)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냈음이 확인된다. 티베트 최초의 통일 국가는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왕국으로서 다스린 송첸캄포(松贊干布, 581 ~ 649년)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663년 수도를 라싸로 정하고 티베트 왕조를 열었고 당 태종의 조카인 문성공주와 네팔의 공주인 브리쿠티 데비와 혼인하였다.티베트의 군대는 663년 ~ 672년에는 동북방의 칭하이와 간쑤 지방의 토욕혼 왕국을 점령하였다.이후 티베트는 13 ~ 14세기에는 원나라의 간접적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1750년에는 청나라 건륭제의 팽창 정책으로 보호령이 되었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티베트의 13대 달라이 라마는 중화민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중화민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티베트 독립 이후에 중국국민당 등의 중화민국의 역대정권과 군사적인 긴장상태가 유지되었으며, 티베트 달라이 라마 정부의 실효적 지배 영역 내에서는 어떠한 중국의 기관도 설치가 승인되지않았다.
하지만 1918년과 1930년에는 티베트 영내로 침입한 중국 군대를 격퇴하는 등 사실상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향유했다.
그러나, 1940년 달라이 라마 14세의 즉위식에 참석한 중화민국은 행정원 몽장위원회라는 사절단을 파견하였다.그러나 의식 후에도 귀국하지 않았고 1948년에 강제로 퇴거되기까지 중화민국 행정원 몽장위원회 주 티베트 대표처'라는 이름으로 라사에 계속 머물렀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연합군의 일원이 되었고, 영국령 인도로부터 이주해 온 영국군에 의해 갼세, 라싸와 카무 지방 각지에 통신기지가 건설되었다.하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게 되면서 중국은 티베트와 타이완을 포함한 중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겠다고 발표한다.
1950년 10월 중국 인민해방군은 티베트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이로써 티베트는 최초로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이후 많은 티베트인들이 정치적인 이유 또는 탄압을 피해 인도로 망명했다.
중국공산당은 티베트인에 대한 고문과 학살로써 티베트를 지배하였고,1960년대에는 중국 전역을 강타한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3,700개나 되던 사찰은 13개만 남고 모조리 파괴되었다.
이후 시짱자치구(서장자치구, 西藏自治區)가 설립되어 티베트인의 자치를 허용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한족이 통치를 유지하였다.
시짱 자치구만 따진다면 티베트의 면적은 122만 8,400km²로 남한 면적 12배 정도의 크기에 인구는 300만 명 정도지만, 시짱 자치구 이외의 중국 내 티베트인 자치 지역까지 합하면[8] 면적 약 220만 km²에 인구 800만 명에 달한다. 넓은 의미로 티베트는 칭하이성 대부분 지역과 간쑤성, 쓰촨성, 윈난성 일부 지역, 독립국인 부탄과 네팔의 티베트계가 다수인 지역, 인도령인 시킴, 라다크, 아루나찰프라데시 대부분, 히마찰프라데시의 라하울 및 스피티 지구, 파키스탄의 길기트 발티스탄의 발티스탄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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