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국가로, 아프리카 대륙에선 독립 이래 민주주의를 계속 유지한 극히 드문 케이스다. 다른 나라의 지도자들과 달리 초대 대통령 세레체 카마가 개도국 지도자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독재의 늪에 빠지지 않았고, 이후에도 2대 대통령인 퀘트 마시레가 장기 집권한다는 비판이 일자, 야당 '보츠와나 국민전선'이 대통령의 임기를 5년 중임제로 제한하는 법안을 제출하였고, 이에 퀘트 마시레가 이 법안을 승인하면서 1998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보츠와나공화국은 남회귀선을 깔고 앉은 아프리카 남부 내륙 국가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면한 남쪽은 칼라하리 사막이고 나머지 땅도 강수량이 적은 고원지대라 농사를 짓기에는 척박하다. 대한민국의 약 6배인 땅에 2016년 현재 약 200만 명이 산다. 19세기 내내 영국 식민지였다가 보호령(당시 국명 베추아날란드) 시절을 거쳐 2차 대전 후 아프리카 국가들이 잇달아 독립하던 끝물인 1966년 9월 독립해 영연방 공화국이 됐다.
1960년대의 아프리카는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지닌 대륙이라는 평가와 함께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가 퍼져 있”던 때였다.(‘아프리카의 운명’ 마틴 메러디스 지음, 휴머니스트) 냉전의 정치논리가 겹쳐 서방의 농업ㆍ광업자본이 퍼부어지던 시기였고, 외국서 공부한 청년 인재들이 구세대 권력자들과 힘을 겨루며 아프리카의 미래를 개척해가던 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다수가 권력에 취해 국가의 운명을 어지럽힌 것도, 따지고 보면 냉전의 치명적 부작용이었다. 아프리카만의 일도 아니지만, 반공(反共)은 불의의 권력이 남용한 백신이었다.
보츠와나공화국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국제자본의 입장에서 보츠와나는 바다도 없고, 이렇다 할 광물자원도 없고, 플랜테이션 농업도 불가능한 나라였다. 거대한 보수 반공국가 남아공이 이웃이어서 지정학적 가치도 덜했다. 독립할 무렵 남아공 뉴스통신사 SAN는 보츠와나를 “길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황무지(vast, trackless wasteland)”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길이 없어서, 온 나라에 포장된 도로가 고작 12km였고, 최대 수출품이 육류(소고기)였다. 1인당 국민소득은 약 60달러. 병원도 거의 없고, 중등학교도 달랑 한 곳에 불과했다. 참담한 얘기지만, 결과적으로 그 초라함이 보츠와나의 행운이었다.
2016년의 보츠와나는 아프리카 최부국이자 GDP기준 국제사회의 어엿한 중위권 국가다. 1인당 국민소득도 1만6,380달러로, 50년 전 보츠와나의 청년 대다수가 광산노동자로 품을 팔러 가던 남아공(1만2,860달러)보다 높다. 보츠와나가 ‘아프리카의 모범’ 혹은 ‘예외’라 불리게 된 데는 물론, 독립 직후인 1969년 발견된 다이아몬드 광맥 덕이 컸다. 간섭 않고 방치해 온 남부의 방대한 사막과 야생 초원이 90년대 이후 관광자원으로 진가를 발휘한 것도 보츠와나 경제의 큰 축이었다.
하지만 북쪽 담장을 공유한 앙골라를 비롯, 멀지않은 콩고민주공화국과 시에라리온 등이 그랬듯, 귀한 광물 자원은 아프리카 비극의 씨앗이기도 했다. 보츠와나는, 세계 3대 매장량을 자랑하는 거대 다이아몬드 광맥을 품고도, 독립 이래 단 한 번의 쿠데타나 내전, 전쟁을 겪지 않았다.
권력자의 독재와 부정부패로 말썽을 빚은 예도 없었다. 관광산업의 성장도 정치ㆍ사회적 안정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아공 민간 경제 싱크탱크 ‘브렌트허스트 재단’ 평가처럼, 보츠와나의 기적을 일군 건 한 마디로 정치였고, ‘신뢰할 만한 정부’였다. 그러니 그 정치 그 정부의 초석을 놓고 법치의 원칙을 구축한 두 정치인, 초대 대통령 세레체 카마(Srertse Khama, 1921~1980)와 2대 대통령 퀘트 마시레이(Quett Ketumile Joni Masire, 1925~2017)가 보츠와나의 최대 행운이었다.
마시레이는 1925년 7월 23일 보츠와나 수도 가보로네(Gaborone) 남쪽 칸예(Kanye)라는 도시의 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또래 아이들과 다름없이 소를 치며 자랐지만, 집안 사정이 좋았던지 13세에 초등학교(Rachele Primary School)에 입학했다. 공부로 두각을 나타내 19세(44년)에 장학금을 받고 남아공 프리부르크(Vryburg)의 타이거 클루프(Tiger Kloof) 중등학교로 진학했다.
46년 부모가 세상을 뜨면서 장남인 그는 동생들을 보살피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고, 갓 문을 연 고향의 첫 중등학교(현 Seepapitso고교) 교사로 취직했다. 4년 뒤 그는 그 학교 교장이 됐다.
그는 신학문을 경계하며 사사건건 간섭하려 들던 부족장(Bathoen 2세)에 맞서 교사단체(베추아날란드 아프리카 교사연합)를 설립했다고 한다. 그런 갈등 탓이었는지, 그는 56년 학교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저축한 돈으로 트랙터를 사서 독학으로 깨친 건조 농법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그는 보란 듯 성공했고, 바로 이듬해 베추아날란드보호령 최초로 영국 농무성이 주는 농업 장인 인증서(Master Farmer’s Certificate)’를 받았다.
(dailynews.gov.bw) 그리고 또 이듬해인 58년 그는 ‘나델리 야 보츠와나’라는 신문사 기자가 됐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부족장이 공유지 무단 점유를 문제 삼아 그의 토지를 압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청년기의 저 이력들은 확증적인 기록이 없어 더러 석연찮은 대목도 있지만, 어쨌건 30대 초반의 그는 낡은 전통에 맞서 변화를 추구하는 비범한 식민지 청년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60년 베추아날란드 제헌의회 의원이 됐다. 당시는 보츠와나의 독립이 사실상 예정돼, 세레체 카마 등 유학파 엘리트들의 정치활동이 활발하던 때였다. 마시레이가 네 살 위의 세레체를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세레체 카마는 여러모로 마시레이와 달랐다. 카마는 보츠와나 최대 부족 바만와토족 추장의 아들로 4살 때 추장이 됐다가 섭정이던 숙부에게 사실상 추방 당해 남아공과 영국에서 성장한 귀족 엘리트였다.
옥스퍼드대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영국 여성과 결혼했다. 56년 입국한 그는 비전과 카리스마를 지닌 정치 지도자로서, 영국과의 독립 협상과 ‘다민족 민주주의’ 국민 계몽운동에 헌신했다. 62년 보츠와나민주당(BDP)을 창당할 무렵 그의 곁에는 교육자와 기자, 농업지도자로서 대중적 네트워크를 구축해온 마시레이가 있었다.
“카마가 당대표였고 나는 사무총장에 선출됐다. 사무총장은 당의 모든 걸 챙겨야 하는 자리였고, 정치 정당이 뭔지 대중들에게 설명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보츠와나 국민들이 아는 ‘Party’는 ‘Tea Party’ 밖에 없던 때였다.”(mmegi.bw) 마시레이의 위트와 정치력은 70년대 이후 주변 국가의 숱한 분쟁을 중재하는 협상을 이끈 힘의 바탕이기도 했을 것이다.
세계인명사전에 소개된 건국 전후 일화 중에는 그가 14일간 4,800km를 이동하며 20여 차례 회의를 주재했다는 기록도 있다.(w.p, 2017.6.24) 비행기는커녕 포장도로도 없던 때였다. “독립을 얘기하면 (대다수가) 지나치게 용감하거나 지나치게 바보거나 둘 중 하나라고 여기던 때”(NYT, 17.6.29)이기도 했다. 보츠나와민주당은 65년 첫 선거에서 81% 지지율로 집권했고, 이듬해 독립과 함께 세레체 카마는 초대 대통령이, 마시레이는 재무장관 겸 부통령이 됐다.
초대 정부는 유엔 개발자금 등 외자를 끌어와 학교와 병원을 짓기 시작했다.
남아공의 글로벌 다이아몬드기업 드비어스(De Beers)가 칼라하리 사막 동쪽 끝 오라파(Orapa) 지역에서 다이아몬드 광맥을 발견한 것은 1969년이었다. 세레체 정부는 채굴권을 넘기고 목돈과 커미션을 받는 당시 아프리카 국가들의 관행과 달리, 정부와 기업이 50대 50 지분으로 합자회사를 설립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 일을 주도한 게 재무장관 마시레이였다. 세레체 정부는 그 재원으로 학교와 도로를 건설하고, 병원과 관개시설, 농업기술을 개량했다. 보츠와나 정부가 아프리카의 가장 청렴한 정부로 평가 받고, 외세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데는 자원의 저주를 제도적으로 차단한 덕이 컸을 것이다. ‘Botswana: A Diamond in the Rough’이란 책을 쓴 하버드대 경영대 로라 알파로(Laura Alfaro) 교수와의 2002년 인터뷰에서 마시레이는 “대통령궁을 짓고 동상을 세우는 대신 나는 학교를 지었다”고 말했다.
80년 7월, 59세의 카마는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부통령 마시레이는 그의 정부를 물려받아 잔여 임기를 이끌었고, 3차례 연임(5년 임기, 의회 간선)하며 98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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