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금 또는 청(淸)이 여진족(만주족)의 힘만으로 인구 100배나 되는 중국을 제압할수 있었을까.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후금은 끊임없이 몽골족과의 유대관계를 맺었다. 현대식 개념으로 동맹을 체결한 것이다. (여진족 인구:50만?)
이웃의 적을 상대하려면 동맹을 잘 선택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누르하치나 그의 후계자인 홍타이지는 만주족과 몽골족을 통합하려고 애썼고, 그 덕분에 동양 천하를 제패할수 있었다.
몽골은 한때 중국 대륙은 물론 동유럽, 아랍, 중앙아시아를 차지하며 대제국을 형성했다. 한족이 명나라를 세우자, 몽골족은 겨울수도인 상도(上都)로 대피했지만, 명 조정을 내내 괴롭혔다. 몽골은 중원을 빼앗긴 후에도 징기스칸 후손인 황금씨족이 칸의 자리를 이어갔다.
북쪽으로 쫓겨간 이후 몽골족은 동몽골(타타르)과 서몽골(오이라트)로 나뉘고, 동몽골은 막남, 막북으로 세력이 분화되었다. 1449년 서몽골의 오이라트가 강성해져 북방을 위협하자 명 6대황제 정통제(正統帝)가 진압에 나섰다가 포로로 잡히는 이른바 ‘토목(土木)의 변’을 당하기도 한다. 1550년에는 황금씨족의 후예 알탄칸( 몽골 튀메드부의 군주)이 베이징 성문까지 진격해 수도 외곽을 불태우고 돌아가기도 했다. 명나라는 몽골에 막대한 은(銀)을 하사해 달래야 했다.
그러던 중 만주에 여진족이 세력을 통합하면서 북방에 변화가 생겼다. 여진족과 몽골족은 이웃해 살면서도 오랫동안 대립관계에 있었다. 송대에 금(金)나라가 강성했을 때 몽골족은 여진족에 복속했지만, 징기스칸이 일어나면서 금나라는 몽골족에 의해 멸망했다.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합하고 해서여진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1593년 해서여진 4부(예허, 하다, 우라, 호이파)는 예허(葉赫) 부족을 중심으로 2만명과 몽골족 1만명이 9개부족 연합군을 편성해 누르하치의 건주부를 공격하다 패배했다. 이 전투는 몽골족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북방에 새로운 강자가 부상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건주여진은 압록강의 북쪽으로 훈허(渾河) 상류부터 동가강(佟家江)에 걸쳐 거주했으며, 숙수후(蘇克素滸,후너허(渾河,왕야,동오,저천(哲陳)의 5개 아이만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외에 백두산 일대의 너옌(訥殷,주셔리(朱舍里,야루걍(鴨綠江의 3개 아이만도 때로 건주여진의 일부로 분류되었다.
해서여진:예허, 우라, 하다, 후이파
야인여진:파아손(巴兒孫),착화(著和),홀라온 (忽剌溫),1436년 (함경도)호(胡).
이 전투를 계기로 몽골족 가운데 누르하치에 복속하는 부족이 생겨났다. 9부 연합군에 가담한 코르친 부족과 할하 부족이 누르하치에게 사신을 보내 복종을 다짐했다. 두 부족의 복속은 몽골족의 분열을 초래했다.
누르하치는 몽골족과의 혼인을 적극 장려했다. 아니, 강요했다고 해야 옳은 표현일 것이다. 유목민족에게 결혼은 그 자체가 정치적 행위였다. 혼인은 동맹의 표시였고, 파혼은 전쟁의 신호였다.
만몽(滿蒙) 두민족 간 정략결혼은 누르하치가 앞장섰다. 1608년에 몽골 코르친 부족은 통혼 의사를 누르하치에게 타진했고, 누르하치는 이를 허락했다. 1612년, 누르하치는 코르친부 추장 밍안(明安)의 딸을 보르지기트(博爾濟吉特)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이 것이 만몽 왕족간 첫 결혼이었다. 3년 후 1615년에 누르하치는 밍인의 동생 콩궈얼의 딸을 맞아들였다. 누르하치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주요 아들들에게도 몽골 왕족과 귀족들의 딸을 아내로 맞아 들이게 했다.
후금 2대왕 홍타이지도 몽골 부족과의 결혼에 적극적이었다. 그에게는 황후와 후궁 15명이 있었는데, 그중 7명이 몽골족이었다. 그 중 두 번째 부인이 그의 사후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가 된다.
누르하치의 둘째 아들인 예친왕(禮親王) 다이산(代善)도 이미 결혼했지만 몽골족 부인을 얻는다. 후에 순치제의 섭정왕이 되는 도르곤(多爾袞)도 부인 열명 중 다섯명이 몽골인이었다.
이처럼 몽골인들은 후금의 건국기부터 귀족이자 왕비족으로 청 황가(皇家)의 주요 세력으로 등장한다. 1627년 부친 누르하치가 금주(錦州)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했다가 명나라 맹장 원숭환(袁崇煥)에게 패해 물러나면서 홍타이지는 만리장성을 직공하는 것보다 몽골족의 영토로 우회하는 공격로를 개척하게 된다.
후금은 자발적으로 복속하는 몽골부족은 융화시키되, 저항하는 몽골족은 끝까지 정벌했다. 후금이 몽골 부족을 하나씩 복속시켜 나가자 몽골족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하고 징기스칸의 직계 부족인 차하르가 강하게 반발했다. 황금씨족을 이어나가던 차하르의 릭단칸(林丹汗)은 누르하치에 대항하기 위해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명나라는 수만냥의 은을 릭단에게 하사했다. 하지만 릭단은 그 돈을 독식하며, 그에게 복속했던 부족들을 강압적으로 이끌었다.
드디어 후금과 차하르의 한판 대결이 벌여졌다. 후금과 몽골의 주력부족 사이의 전투는 누르하치 말기부터 시작되어 홍타이지에 이어졌다.
홍타이지는 차하르와 다섯 차례나 전투를 벌이며 몰아부쳤다. 1632년 4월 마지막 원정에서 홍타이지는 만몽연합군 10만명을 이끌고 차하르의 근거지인 귀화성(歸化城)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릭단은 서부 칭하이(靑海)로 도망쳐 티베트 원정을 시도하다가 1634년 사망했다.
이제 몽골족 전체가 홍타이지의 후금에게 접수되었다.
릭단의 정비 나무종과 후비 더우투먼은 락단이 죽은후 홍타이지에게 후비로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홍타이지는 적의 왕비를 선선히 부인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에는 강요가 없었다고 한다. 이는 승자의 아량이며, 패배한 부족을 받아들이는 신호였다.
1635년 차하르 5차원정 도중에 홍타이지의 이복 동생 도르곤과 맏아들 호고 등이 정예기병 1만명을 이끌고 출전하던 중에 하늘이 내린 큰 선물을 받았다. 원정군은 황하를 건너 릭단의 잔당을 소탕하던 중에 ‘대원 전국옥새’(大元 傳國玉璽)를 얻게 된다. 드디어 홍타이지는 황제가 될 기회를 맞게 된다.
13세기 금(金)나라가 몽골과 송나라의 동맹에 의해 멸망할 당시만 해도 만주의 여진족이 다시 중원을 차지해 제국을 건설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르하치 스스로도 살아있을 때까지 중국을 지배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가 칠대한(七大恨)을 발표하며 명에 선전포고할 때만해도 여진족의 통일을 희망했을 뿐이다.
하지만 인구 1백만명도 되지 않았던 만주족은 인구 1억이 넘는 한족을 지배했다. 그 원동력은 통합의 힘에 있었다. 후금은 복속시킨 부족과 종족을 지배해지 않았다. 그들을 동맹으로 만들어 냈다.
누르하치의 통합정신은 홍타이지와 도르곤을 이어가며 세력을 확대시켜 갔다. 후금은 대를 이어가며 정벌과 복속, 통합의 과정을 거쳤다.
만주족과 몽골족은 13세기 이래 오랫동안 대립해 왔다. 하지만 17세기초 후금과 청나라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는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는 몽골족과 생산적 동맹을 넘어 제국을 형성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동몽골족:다르카드부, 다리강가인, 엘지긴인, 할하인, 코토고이드부, 사르툴씨
서몽골족:우량카이부, 알타이, 우량카이탕누, 우량카이오이라트부, 바투드부되르벤, 오이라트(코슈트인.바야드부. 찬투인), 초로스인, 코이드부, 코톤인, 칼미크인(사르트칼미크인) 미앙가드부, 욀뢰드부, 토르구드부, 자크친인
북몽골족:부랴트인.바르가부, 캄니간인
남몽골족:아바가부, 아바가나르인, 아오한인, 아수드부, 바린인, 차하르부, 동 도르베드부, 고를로스인하르친부, 키식텐인, 코르친부, 쿠치드부, 잘라이드부, 자루드부, 무먕간인, 나이만인, 오니구드부,오르도스부, 수눈드부, 투메드부, 우라드부, 우젬친인
그 통합의 상징이 팔기(八旗)제도다.
후금은 여진족을 통합하면서 상호 이질적인 부족들을 팔기라는 부대에 합류시켰다. 각 부족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하나의 깃발로 뭉치게 하고, 여덟 개의 깃발로 군대를 조직해 대통합을 이루는 방식이다. 한족 8기도 정복당한 민족을 상대로 지역성, 독자성을 살리며 만들어진 조직이고, 몽골 8기도 각자의 부족 독자성을 인정하며 통합한 군사조직이다.
다양한 인종과 부족을 통합할 줄 안 것이 후금의 지도자들이었다. 동맹의 필요성도 그들은 알았다. 한때 으르렁거리며 전쟁을 벌였던 인종과 부족도 일단 통합하면 하나의 깃발 아래 뭉치게 했다.
▣여진족(만주족):여진(女眞)은 흑수말갈이 남하하면서 금대에 이르기까지 발해인과 여러 말갈 제부 그리고 발해의 후계국인 올야, 금의 오국성에 위치했던 포노리국, 철려국(鐵驪國, 鐵利國), 오리미국, 월리독국, 부아리국 및 황두실위 등이 결합하여, 형성된 민족이다.
이들 중 생여진의 완안부는 1115년, 금나라를 건국하여 1234년까지 건재하였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자, 황두실위와 일부 거란족과 여진의 민족 동화 과정이 있었다. 금나라는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로록 그 주위에 여진인을 이주시켰다. 이 시기에 거란의 일부가 여진으로 동화된다. 금나라 멸망 이후, 명은 여진을 야인 여진(野人女眞), 해서 여진(海西女眞), 건주 여진(建洲女眞)으로 나뉘었다.
그 후 1619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여진의 표면상 세 부를 통합했고, 1635년, 청 태종은 여진이라는 족명을 금지하고, 야인 여진 일부를 제외한 뒤 만주족으로 족명을 개칭했으며, 1640년대에는 몽골의 하라친(만주어: Karacin) 그리고 시버족 등의 부락들도 만주인으로써 청 제국의 만주팔기를 구성하게 된다.
▣먼터무(한자: 孟特穆 맹특목, 1370년 ~ 1433년) 또는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는 오도리 만호부(斡朶里 萬戶府)의 만호이자 제1대 건주좌위지휘사(建州左衛指揮使, 재위 1405년 ~ 1433년)이며 청 제국 태조 누르하치의 6대조이다.
두두는 도독(都督)의 만주식 독음으로 벼슬을 의미하므로 본명은 그냥 "먼터무"이다. "동맹가첩목아"란 "먼터무"를 몽
골식으로 읽은 "멍거터무르"를 한자로 가차한 뒤 중국식 성인 동씨를 하사받아 붙인 것이다. 《용비어천가》에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중세 한국어 표기는 갸온멍거터물(夾溫猛哥帖木兒 협온맹가첩목아)이다. 먼 훗날 청 태조에 의해 추숭되어 추존된 시호는 택왕(澤王)이었고, 순치 5년(1648년), 순치제에 의해 다시 추존되어황성인 아이신 교로씨와 합쳐 아이신 교로 먼터무(愛新覺羅 孟特穆)라고도 한다.
시조 부쿠리용숀(布庫里雍順)의 첫 정착지는 삼성(三姓, 하얼빈 동북쪽 쑹화 강 언덕)이었다.
원나라는 이곳에 3개의 만호부를 설치하고 여진인에게 관작을 주어 다스리게 하였다. 부쿠리용숀은 백두산 북쪽 오돌리(Odoli, 斡朶里, 吾都里, 鄂多理, 斡朶怜)으로 옮겨 살았고 국호(國號)를 만주라 하였다. 원나라가 설치한 만호부 중 오돌리 만호부(斡朶里 萬戶府)의 만호직은 누르하치의 선조가 세습하였다.
먼터무는 몽골 제부족의 잦은 침략을 피해 훌리가이 만호부(元良哈 萬戶府)의 만호인 구룬 아하추(古論 阿哈出)와 함께 남하하였다. 아하추는 혼하 상류의 풍주(風州, 지린성 해룡현)에 거주하였고 먼터무는 더 남하하여 조선의 회령 지방에 거주 하였다. 《용비어천가》는 이 시절 먼터무가 퉁두란과 함께 이성계의 부하 노릇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성계의 부하였던 여진 부족장들 중 먼터무가 필두로 올라와 있고, 퉁두란은 다섯 번째로 올라와 있다.
1388년 명나라는 여진족의 몽골과의 결합을 우려하여 건주여진의 세 종족 오돌리, 훌리가이, 투오원에게 여진족에게 관직을 하사하고 위소(衛所)체제에 편입시켰으며, 조공과 마시(馬市, 여진과의 교역을 위해서 국경에 열던 무역장소)의 경제적 이익을 제공했다.
1403년 명나라 정부는 본격적으로 쑹화 강, 아무르 강 지역의 여진족을 감시하기 위해 각 여진부족의 우두머리들에게 명나라 관직과 작위를 제수하여 이곳을 다스리고자 하였다. 1403년 풍주(風州:지린성 해룡현)에 거주하던 훌리가이부의 아하추는 명나라에 귀부하여 건주위지휘사(建州衛指揮使)라는 관직을 제수받고 이 지역을 통치 하였다. 이로부터 명나라는 아하추와 먼터무의 세력을 합쳐 건주여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조선은 1392년 7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조선 국왕으로 즉위하자 여진족을 초무하고자 하였다. 조선 태조는 태종 이방원을 경흥(慶興)으로 보내 고조부 목조(穆祖)와 그 부인을 모신 덕안릉(德安陵)을 수축했다. 조선 왕조를 세운 시조의 뿌리가 함경도에도 머물렀음을 현창하고, 그를 바탕으로 주변의 여진족들을 확실히 장악하려는 의도였다. 1395년 마침내 먼터무는 한양으로 와서 조선 태조에게 토산물을 바치고 머리를 조아렸다.[2] 조선은 태조가 먼터무에게 경성등처만호(鏡城等處萬戶)의 직사(職事)를 제수하였으며 태종은 상장군(上將軍)의 직사(職事)을 제수하였으나[3] 먼터무는 1411년 회령을 떠나 풍주로 이동하여 훌리가이부와 합류 하였고, 이듬해인 1412년에 명나라에 귀부 하였다. 명나라는 이에 건주위에서 좌위(左衛)를 분리하여 그에게 건주좌위지휘사(建州左衛指揮使)를 제수 하였으며, 중국식 성인 동(童)씨를 하사하였다.
1433년 개원천호(開原千戶)였던 후룬여진의 우디거부(Udige, 兀狄哈部)의 추장인 양 무타우타(Yang Mutawuta, 楊木塔兀)를 수령으로 하는 7성야인반란이 일어나게되어, 명나라에서는 요동첨사 배준을 회령으로 파견하여 이를 진압케 하였고, 먼터무에게도 협공 지원토록 하였다. 이 싸움에서 먼터무와 그의 장자인 아구(Agu, 阿古, 權豆)는 전사하였고, 차자인 충샨은 포로로 잡혀갔다.
16세기 후반의 여진족은 현재 중국의 동북지역과 러시아의 연해주를 포괄하는 광활한 지역에서, 초기적 형태의 국가들을 이루거나 부족 혹은 씨족 단위로 흩어져 거주하고 있었다. 명나라 여진의 지역에 일종의 행정구획인 위소(衛所)를 200여개 설치하고, 여진의 여러 부족장을 그 수장으로 임명하여 간접적으로 통제했다.
당시 명은 이들을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의 세 집단으로 구분하였다. 세 집단의 하부에는 아이만(部, 만주어: Aiman)이나 구룬(國, 만주어: Gurun)으로 불린 여러 정치적 독립집단이 존재했고, 때로는 이 하부 집단도 통일되지 못한 채 내부적으로 여러 씨족과 부족이 권력을 다투고 있었다.
건주여진은 압록강의 북쪽으로 훈허(渾河) 상류부터 동가강(佟家江)에 걸쳐 거주했으며, 숙수후(蘇克素滸, Suksuhu·후너허(渾河, Hunehe)·왕야·동오·저천(哲陳, Jecen)의 5개 아이만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외에 백두산 일대의 너옌(訥殷, Neyen)·주셔리(朱舍里, Jušeri)·야루 걍(鴨綠江, Yalu Giyang)의 3개 아이만도 때로 건주여진의 일부로 분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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