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은 고대부터 서양과 동양을 연결하는 중요한 곳으로 실크로드의 핵심 루트 중 하나였다. 바닷길이 열린 후에는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요충지로 변했다.
아프카니스탄 전쟁은 서구 열강이 전세계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땅따먹기 싸움을 하던 제국주의 시대에 러시아 제국의 부동항 진출을 막기위해, 영국과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이 벌인 전쟁으로 9세기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영국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에서 있던 3차례으로 전쟁은 다음과 같다.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1839~1842)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1878~1881)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1919)
영국군은 1820~30년경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고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러시아와 경쟁을 벌이게 된다.
당시 펀잡 지방에는 시크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켜, 시크교 왕국을 건설하고 있던 중이었다. 영국은 아프간의 지원을 얻고자 아프간의 아미르인 도스트 무함마드 칸과 접촉하였다. 무함마드 칸도 시크교도들에 의해 파키스탄 북부지역에 해당되는 영토를 빼앗긴 터라 호의적으로 나섰으나 영국도 파키스탄을 노리고 있는 경쟁자임을 곧 깨닫고 동맹 논의는 무산되었다.
그런데 이 때 영국과 대립하며 점차 세력권을 넓히던 러시아 제국이 이를 알고 무함마드 칸에게 접촉, 영국이라는 공동의 적이 생긴 두 세력은 협상에 상당히 진전을 보기도 했다.
이에 영국은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이 연합하여 자신들을 공격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여 아프가니스탄의 적법한 지도자를 세우는 것을 원조한다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본격적으로 침공하여 아프가니스탄 지도자들을 몰아내고, 1839년 '샤 슈자'를 새로운 왕으로 앉혔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여 멋대로 쳐들어와 왕을 갈아치우는 영국에 대해, 그리고 그 영국의 의해 왕위에 오른 '샤 슈자'와 그 부하들에 대해 바라크자이 왕조(1826 ~ 1919)의 아프가니스탄인들은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이 왕이 된 샤 슈자의 통치력은 카불, 칸다하르 등 주요 도시와 그 부근을 넘어서지 못했고 아프가니스탄은 심한 혼란에 빠졌다. 결국 영국군의 주둔은 점차 길어지고 영국에 의해 쫓겨난 '도스트 무함마드'의 아들, '악바르 칸'은 혼란을 틈타 군대를 모으고 있었다.
샤 슈자나 영국은 이 혼란을 진정시키지 못했고, 결국 카불에서 대대적인 봉기가 발생하였다. 성난 아프간 사람들에 의해 샤 슈자의 군대는 모조리 격파당했고 영국군 주둔지도 군중에 포위당해 300여명의 병사가 죽고 말았다.
영국 측은 새로이 지도자로 떠오른 악바르 칸과의 협상을 통해 일부의 인질만을 남기고 영국군 4500명과 민간인 12000명을 '잘랄라바트 요새'까지 이동하는데 안전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침략자 영국인들에게 분노한 악바르 칸과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이 협상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영국인들은 잘랄라바트 요새로 가는 동안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붙잡히거나 살해당했다. 결국 잘랄라바트로 살아서 도착한 사람은 의사 1명 뿐이었다.
악바르 칸과 그의 군대는 기세를 몰아 잘랄라바트 요새를 공격했다. 당시 요새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아프간군의 4분의1 규모에 불과했으나 화력이 압도적이었으며 처절하게 저항한 끝에 아프간군이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여 요새를 사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영국군은 군대를 다시 정비하여 아프간을 재차 공격, 카불을 재함락시키는 데까지 성공했으나 결국 아프간 사람들의 저항에 오래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고 만다.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손에서 해방되었으며 돌아온 '도스트 무함마드'가 다시 아프간의 지도자가 된다.
도스트 무함마드는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다 사망하였다. 무함마드의 왕위는 실 알리가 계승하였다. 실 알리는 영국에게 적대적이라서 영국 외교관을 추방하는 등 영국에 모욕을 주었으며 이에 분노한 영국은 약 4만명의 대군을 소집하여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다.
이때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지도자 실 알리가 1879년 2월에 사망하면서 큰 혼란에 빠지는 비극이 벌어졌고 영국군에 의해 카불이 점령당하기까지 한다. 결국 실 알리의 아들인 야쿱 칸은 영국과 간다마크 조약을 맺었다. 영국에 점령당한 영토를 되찾고 나라의 명맥을 유지할 수는 있었으나, 외교권을 영국에 양도하여 사실상의 보호국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1879년 9월 아프간에서 대대적인 봉기가 일어나 영국인 외교관인 피에르 카바그나리 경을 죽이는 등 불이 다시 붙자 분노한 영국은 군대를 또다시 아프간으로 진군하였다. 영국은 야쿱 칸이 이 봉기의 배후에 있었다고 보고 야쿱 칸을 폐위시키고 영국에게 우호적인 압둘 라흐만 칸을 옹립하였다. 야쿱 칸은 간다마크 조약의 폐기를 선언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하고, 압둘 라흐만 칸은 간다마크 조약이 유효함을 인정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이 영국의 보호국이 된 것이다.
2차 아프간 전쟁 이후, 압둘 라흐만 칸과 그의 후계자인 하비불라 칸 시대까지 친영정책이 유지되어 영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하비불라 대에 이르러서는 영국이 아프간에 지나치게 간섭하여 들기 시작하여 아프간은 오스만 투르크와 독일을 끌어들여 영국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오스만과 독일과의 여러 차례 교류와, 영국이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아프간을 방어해낼 여력이 없음을 알은 하비불라 칸은 아프간을 완전한 주권국으로 부활시킬 꿈을 꾸었다. 이에 하비불라는 영국에게 이를 요청하였으나 영국은 이를 거절하고, 1919년 2월 하비불라는 암살당한다.
하비불라가 암살당한 이후 그의 동생인 나스랄라 칸과, 하비불라의 아들이었던 아마눌라 사이에 왕위계승 분쟁이 일어났다. 보수파가 나스랄라를 지지하고 민주주의적 성향을 띈 개혁파가 아마눌라를 지지했는데, 아마눌라가 분쟁에서 이기고 나스랄라를 구금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나라는 극히 불안정했고 보수파들은 공공연히 쿠데타를 이야기하고 다녔다. 보수파의 지지를 얻고 내부 불안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아마눌라는 영국령 파키스탄과 인도를 침공하였다.
비록 영국군이 아프가니스탄군에 비해 우월하다고는 하나, 이미 영국군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상당한 군인과 장비를 소모한 상태였기에 잘 해본다면 승산이 있는 싸움이었다. 초기에는 이를 이용하여 아프가니스탄군이 상당히 진군하였으나, 전열을 가다듬은 영국군의 반격과 아프가니스탄군 사이의 내부 분열로 인해 오히려 밀리기 시작했다. 당시 아프간군은 통일된 군대가 아니라 여러 부족들의 민병대를 규합해서 모은 연합부대의 성격에 가까웠기에 분열이 매우 극심했다. 특히 부족의 족장들을 국왕이 통제하지 못하다 보니 단합력도 떨어졌다. 결국 아프가니스탄군은 1천명의 전사자를 냈고 나중에는 전세가 아프가니스탄에게 불리했다. 하지만 영국과 아프가니스탄 둘 다 싸움을 지속할 여력도, 의지도 없었다.
결국 양측이 라왈핀디에서 회담을 가져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완전 독립을 보장하며 떠났고 아프가니스탄은 영국과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면서 끝났다. 아프가니스탄은 그리도 원하는 완전한 주권국이 될 수 있었지만, 장기간 식민통치를 받고 독립전쟁을 치르며 큰 타격을 입었고 영국이 보내주던 막대한 액수의 보조금도 사라져 한동안 재정난을 겪어야만 했다.
영국-아프간 전쟁은 1, 2, 3차로 나뉘긴 했지만 각각의 전쟁 기간들을 합쳐도 소련-아프간, 미국-아프간 전쟁에 비하면 전쟁기간이 제일 적었다. 또한 각각 전쟁의 피해도 소련, 미국보다 적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1차 영국-아프간 전쟁은 영국과 청나라가 아편전쟁을 벌이던 시기에 동시에 벌어졌고, 마지막 3차 영국-아프간 전쟁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은 전쟁으로 인한 후폭풍으로 인해 매우 고생했으나 영국은 후폭풍 또한 약해 고생을 거의 안 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1979년 12월 24일부터 1989년 2월 15일까지 소련과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막대한 전비소모로 인해 소련 해체에도 영향을 주었다.
거의 10년 간의 전쟁에 투입된 소련군은 62만 대군인데 이들 중 8만-10만 정도가 평상시 유지 숫자였다. 전쟁으로 인한 소련 측의 전사자는 1만 5천여 명, 부상자 5만 4천여 명이며,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힌 숫자도 수백여 명에 달한다. 거기에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귀환한 소련군 장병들 중 포탄 쇼크나 정신 이상 증세, 부상,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40만이나 되었다. 또한 친소련 아프간 정부군은 1만 8천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2001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발생한 전쟁이다. 미국은 초기에 캐나다와 영국의 지지를 받았고, 이후 모든 NATO 회원국을 포함한 40개국의 지지를 받았다.
이 전쟁의 일반적 목표는 알카에다를 해체시키고, 탈레반 정권을 축출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알카에다의 안전한 작전 기지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으로 분류된다.
미국이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킨 뒤 쓴 돈은 최소 2조 달러(약 2383조 원)로 추정되며 미군 사망자는 2300여명으로 아프간 군(6만4124명)이나 알카에다ㆍ탈레반(4만2100여명)보다 훨씬 적지만 부상자는 20만589명에 달한다.(2018년 10월).
결국 2020년 2월 29일 카타르 도하에서 장장 18년간의 분쟁에 종지부를 찍는 '도하 합의'가 진행되었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과 동맹국을 공격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그 대가로 미군은 합의이행 1단계 과정으로 135일 이내 8천600명 수준으로 감축할 것을 보장했다. 여기에 국제동맹군과 아프간 정부군의 탈레반 대원 5천명과 탈레반 포로 아프간군 1천명의 포로교환도 포함됐다.
한 마디로 제국의 무덤이다. 큰 나라가 국력만 믿고 여기를 쳤다가 좋은 꼴 본 일이 거의 없다. 쿠샨 왕조,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티무르 제국, 무굴 제국 정도가 대부분의 영토를 직접 지배했고, 이런 왕조들은 애당초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된 왕조이므로 이 땅을 직접 지배한 '외세'는 알렉산드로스 헬레니즘 제국과 몽골 제국뿐이지만 헬레니즘 제국 내에서는 아프간 산지 내 주둔한 그리스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독립해 버렸고, 몽골 역시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인도를 정복하는 것은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 몽골 세력은 나중에 4칸국 분할 후 금방 망해서 차가타이 칸국 출신의 티무르가 세운 티무르 제국으로 대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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