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전쟁

몽골군의 군사비밀

frog.ko 2020. 11. 12. 11:03

13C 몽골군은 아시아와 중동, 동유럽까지 점령했었던 강력한 군대였다. 그들이 강했던 이유는 뛰어난 장수와 전략가가 있었다는 것 말고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말()이다.

그들이 타는 말은 아랍이나 유럽의 말에 비해 크기가 작다. 그러나 거친 몽골의 자연환경에 단련되어 타지방의 말과는 달리 강건하였고 지구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말이 뛸 때, 아랍이나 유럽 말들은 좌우의 다리가 따로 움직인다. 이는 말을 타는 기수가 피로함을 많이 느끼게 되죠. 이에 비해 몽골말 들은 두 다리가 같이 움직입니다. 이는 즉, 말을 타는 기수가 피로함을 유럽산에 비해 덜 느끼게 된다

.

그러므로 군마로서 몽골말 들은 유럽 산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었다.

 

몽골은 알다시피 유목 민족이다. 말이 집집마다 있었고 그들의 생활수단이었다. 몽골인들은 3살 때부터 승마를 배우고 말의 숫자가 몽골인 들의 수보다 훨씬 많았다. 말이 생활수단이니 몽골군은 전군이 다 기병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1만의 몽골군에서 있는 군마의 숫자는 10만이었다. 그들은 말이 지치면 도중에 쉬지 않고 계속 바꿔타면서 이동해갔다. 그리고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군에 지휘관이 있듯이 말들 중에서도 리더인 말이 있다고 한다. 나머지 말들은 그 리더인 말을 따라가는 것이다.

 

두 번째는 무기로 몽골군의 대표적인 무기는 복합궁이었다.

 

이 활은 보통 뒤쪽에는 힘줄 층으로 되어 있고, 내부 표면은 각층으로 이루어진 것이나 혹은 가운데 나무 골격으로 불룩하게 만들어진 것이었고 이 활은 말위에서 사람이 쉽게 조작할 수 있을 만큼 짧지만 백 파운드 이상의 인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활에서 당겨진 화살은 보통 300야드 떨어진 곳에서도 살상이 가능하며 특히 날카로운 금속성 송곳 바늘이 장착되어 있어 그 당시 가장 두꺼운 갑옷과 투구도 쉽게 관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베기 전용의 월도(月刀)도 한몫했다.

 또 몽골군의 군복도 방어 장비로 뛰어났다. 몽골군은 가죽 갑옷 안에 실크로 만든 옷을 입고 다녔는데 실크가 어떤 효능을 발휘하느냐면 적의 화살 공격에 최대의 효과로 부상을 막을 수가 있었다. 화살이 몸에 박힐 때, 실크가 그 화살을 말아 위력을 반감시키는 원리다.

 

세 번째는 그들의 군대 체계였다.

 

몽골군은 몽골이 통일되기 전, 부족 간의 싸움으로 전투기술 및 경험을 쌓아왔다. 그리고 부족 간의 전투 시 싸울 수 있는 장정은 모두 모아서 싸웠다. 이미 이때부터 그들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징병 제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몽고가 통일된 후, 이러한 징병제로 20만에 달하는 정예 기병 군단을 가지게 된다.(몽골의 인구수에 비례하면 그 숫자는 엄청난 것으로 일종의 국민 개병제로 유럽은 나폴레옹 시대에 도입됐다.)

 

이에 비해 유럽을 보면 한 국가가 최대로 모을 수 있는 병력은 불과 3만이었다. 유럽은 몽골과는 달리 봉건제의 국가였다. 전시에 한 지방의 영주가 병력을 모으면 아무리 모아도 겨우 1000명 정도 밖에 모을 수 없었다.

 

네 번째는 몽골군의 전술에 있었습니다.

 

몽골군은 그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전투에서 잡힌 포로들을 그들의 군대에 흡수하고 항상 포로로 이루어진 부대를 일선에 배치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몽골군의 피해는 이들의 피해였다.

 

그리고 몽골군은 기습과 치고 빠지기 전술(hit and run) 이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몽골군은 싸우다가 퇴각을 하면서 그들의 주무기인 활을 쏘면서 퇴각한다. 추격권은 몽골군을 쫓다가 피해를 입고 다시 돌아가면 또다시 몽골군이 공격하고... 이런 식으로 피해를 입히면서 혼을 빼놓은 다음, 다시 뭉쳐서 마무리 공격을 가한다.

 

유럽 기사들은 그들뿐만 아니라 말에도 갑옷을 입힌 중기병으로 기동성은 아주 안 좋았다. 이에 비해 몽골군은 가벼운 경기병들이었다. 기사들이 몽골군과 싸우기 위해 막상 창을 들고 달려오면 몽골군은 그냥 그들의 활로 쏴 죽였거나 치고 빠질 때 그 길에다가 까치발을 뿌려서 이 둔한 기사단을 농락했다. 이런 전투에 익숙지 않았던 중동, 유럽의 군대는 몽골군에게 계속 패하게 된다.

 

다섯 번째는 그들의 식사 해결이었다.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먹지 않으면 싸울 수가 없다.

 

그 시대의 일반 다른 국가들의 군대는 전투병 1명에 취사, 잡역의 비전투원 2~3명꼴로 이뤄졌지만 몽골군은 개인이 전투병도 되고 취사병도 됐다. .다들 도축에 능숙했으며 그들은 보루 추라는 전투식량을 다 소지하고 있었다.

 

그 전투식량은 다름 아닌 육포였다. 육포는 그들의 음식이었고 말린 음식이라 저장성이나 휴대하기가 그만큼 편했다. 몽골군은 소의 방광으로 만든 주머니 안에 1달 치의 육포를 넣어서 말안장에 걸어서 이동했다.(소의 방광으로 만든 이 물건은 물에도 잘 뜨기 때문에 주둥이를 막은 다음 판자 밑에 연결해 부교로도 썼고 수통으로도 쓴 것이다.

 

그리고 웬만한 음식들은 말려서 보관해 숙영 시 투구를 벗어 물을 담고 육포 넣고, 말린 채소류를 넣어 국을 끓여 먹었다. 이는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보급부대가 달리 필요 없었다는 얘기다. 이는 상당히 실용적이고 능률적이었다.

 

그리고 몽골군은 이동 시에도 양, 소 같은 가축들도 같이 이동시켜 보급에 문제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기술적인 최첨단 테크가 있었다그것은 바로 말의 등자와 말안장에 있었다등자가 발명되기 전까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건 보병이었다. 기병은 말위에 앉아서 불안하게 한 손으로 말을 몰아야 했고, 전쟁터에서 자주 낙마하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등자가 발명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말안장에 앉아 발을 등자에 고정한 기병은 곧 보병을 압도하게 되었다. 당시 그들은 말안장 아래에 발을 받치는 등자를 사용함으로써 말위에서도 두발을 딛고 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고, 말안장은 앞뒤로 받침대가 있어 말위에서 등 뒤로도 활을 자유롭게 쏘아 대는 모습은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뛰어난 기동성, 강력한 무기, 체계적인 군대 체계, 간단명료하면서 뛰어난 전술, 보급, 그리고 칭기즈칸과 그 휘하의 뛰어난 무장들이 그 당시의 최강의 군대라는 얘기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