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전쟁은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알제리 민족 해방 전선(FLN)과 프랑스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알제리 입장에선 독립 전쟁이고, 프랑스 입장에선 식민지 반란군 진압 작전이었는데 1999년 6월에 프랑스 의회는 전쟁이 끝난 지 37년 만에 이것이 "전쟁"이었음을 인정하였다.
전쟁의 결과로 알제리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으며, 프랑스는 석유와 가스 등 막대한 국부를 잃고, 전쟁 중 프랑스 제4공화국이 붕괴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탈식민지화의 대세와 흐름을 무시하고 벌어졌던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과 더불어 유럽 식민지 열강의 식민지 재침의 예시로 평가받는 전쟁이다.
이 전쟁은 탈식민지화에서 중요한 전쟁이었으며, 게릴라전, 민간인에 대한 테러, 양측의 고문 자행, 프랑스 군대의 대테러 작전 등 복잡한 성격을 보인 전쟁이었다.
전쟁 결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
병력: 34만여 명 (알제리 측 주장, 프랑스에선 20만 정도로 축소하고 그동안 학살이 아니라고 반론해왔다가 일부 학살을 인정하고 있다) |
프랑스 |
병력: 프랑스 군 67만여 명, 아르키(Harki, 알제리계 프랑스 군인) 20만 명 이상 |
※ 피에 누아르(Pied-Noir)
피에 누아르는 프랑스령 알제리하에 알제리에 정착하여 살던 유럽계 백인들을 일컫고, 넓게는 프랑스의 지배에 협력하며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받았던 세파르딤 유대인들도 포함된다.
주로 프랑스계, 이탈리아계, 그리고 스페인계이었지만 알제리 내에선 이들 대부분은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과거 프랑스의 알제리 침공 후 식민지배 초기에는 이들은 알제리인 혹은 정착자 (colonist)를 의미하는 'colons'라고도 불렸다.
주로 알제리 북부 해안가와 알제, 오랑, 콩스탕틴과 같은 주요 도시들에 거주하였고 알제리 독립 이전 1959년에는 알제리 인구의 13%, 약 140만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전세계에 약 320만 정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세티프 학살
수도 알제에서 300km 떨어진 도시 세티프에서 2차대전 승전을 축하하며 알제리 국기를 꺼내어 흔들었단 이유로 민간인 45,000명을 학살한 사건으로 세티프는 알제리와 튀니지를 잇는 교통의 요지인데다가, 계속되는 외세의 침입에 맞서 완강하게 저항해온 역사를 갖고 있었다.
또한 세티프는 해안에 인접해 있어서, 외부로부터 정보가 빠르게 유입되고, 민족 해방 운동가들의 잠입이 잦으며, 따라서 주민들의 정치 의식이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성숙했다.
세티프 지역 주민을 비롯해 대부분의 알제리인들은, 2차 대전 중에 북아프리카의 연합군 작전에 참여하면 해방으로 보상하겠다는 프랑스의 약속을 굳게 믿었다.
1941년에 조인된 대서양 헌장에 그 내용이 기재되었고, 드골까지 나서서 알제에 와서 보상을 약속했기 때문에, 알제리인들의 순진함만 탓할 수도 없다. 아프리카 상륙 작전에 영미 연합군이 참가한 것을 목격한 뒤에 알제리인들은 민족 해방의 꿈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1944년 6월 파리가 해방되고 여름과 가을이 지나도록 프랑스 정부가 알제리 문제와 관련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자 알제리인들의 희망은 서서히 분노로 바뀌어갔다. 이런 분노는 대부분의 알제리인이 공유하고 있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정치적으로 훨씬 각성된 세티프 지역 주민들의 분노는 행동으로 표출될 만큼 극도로 고조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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