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국공내전은 만주의 국민당 군이 먼저 공산군을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 했다.
장개석은 의욕을 가지고 이 공산당 섬멸의 내전에 임했었다. 초반에 기세를 올린 장 개석군의 호 종남 장군은 20만 병력으로 모 택동의 근거지 연안을 점령하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연안의 손실보다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만주 확보에 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집중했다.
만주에서 동북 제 4야전군을 조직하고 있던 임표는 전쟁에 돌입했다. 그는 첫 전투인 사평 전투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장개석군에게 대패를 당했다. 연이은 흑산 전투에서도 마찬가지 패배를 당였다.
그러나 패배를 당하던 임표군이 어느 순간부터 엄청나게 강해지기 시작했다. 전세는 급전했다. 밀리던 국민당군의 60군이 1948년 4월 부터 구 만주국 수도 장춘[신경]에서 공산군에게 겹겹이 포위되어 6개월 동안 고통스러운 방어전을 하다가 그해 10월 국민당군의 사령관 증택생이 항복함으로서 함락되었다.
구 만주국 수도 장춘의 함락은 만주, 아니 전 중국의 운명을 결정했다. 국공내전의 3대전역[三大戰役]에서 제일 중요했던 요심전역[遼瀋戰役]은 장춘 함락뒤인 다음 해 1월 북경과 천진 지역, 즉 중국의 심장부분을 공격했던 평진전역[平津戰役]으로 이어졌다.
장 개석 군에게 패배를 당하던 임 표의 부대가 갑자기 막강한 부대가 되어 장 개석 군을 구축해버려서 중국 적화의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는데 중국은 이를 모두 동북 지방 인민들의 열렬한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모양 좋은 말로 이 부분 역사를 가리고 있다.
그러나 한 사실을 간과하지 말자. 일본의 대륙진출 삼 십 년 만에 손에 넣은 만주에 막대한 투자를 했었다. 만주 철도니 소화 제철[안산 제철]이 그런 대형 투자의 표본이다. 그런 투자와 일본의 행정경험이 접목된 통치가 만주국을 군벌들이 난립하고 다스릴 때보다 만주를 훨씬 살기 좋게 만들었다.
공산주의의 창궐은 항상 경제와 상관관계가 있었는데 만주는 경제 사정이 모 택동 사상을 창궐시킨 중국보다 비교적 나았었다. 결과 만주의 GNP는 만리장성 이남의 전 중국의 GNP보다도 더 높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당 군이 갈 곳없던 만주국의 군경(軍警)조직을 받아들여 임표 군 섬멸에 동원했어야 했다. 그런데 진성이 만주군의 편입을 거절했다.
당시 비록 괴뢰 국이지만 만주라는 큰 국가체계에 20여만의 만주군이 있었고 그보다 더 큰 경찰 조직이 있었다. 이들의 지휘관들은 여러 민족으로 잡다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일본인, 중국인, 만주인, 몽골인, 조선인등이 있었지만 역시 중국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일본이 패배하고 만주국 황제 부의도 도망가다가 붙잡혀서 소련으로 끌려간 판에 직업을 잃은 만주군과 만주 경찰 간부들의 입장은 무척 곤란했었다. 이들 대부분 부대는 곧 소련군에게 무장해제까지 당했다.
군인이자 생활인인 이들은 생계도 유지케 해주고 사회적으로도 신분을 보장 해주는 어떤 직업을 원했었다, 대다수 중국인들이나 만주인 간부들은 조선인이나 일본인처럼 귀국할 국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일부 말단 군부대는 무기를 들고 부대 이탈을 해서 지역에 뿌리를 밖고 주민들을 갈취해먹는 범죄 조직이 되었다. 만주에서 청말(淸末)부터 만주 사변 전까지 만주에 만연했던 마적(馬賊)들이 된 것이다. 토비[土匪]라고 불리던 이들은 나중에 공산군에게 모두 토벌을 당해 없어졌다.
일본으로부터 반공사상을 주입받았었고 공산 게릴라들과 싸웠던 이들은 당연히 진주해온 국민당군에게 아쉬운 손을 벌렸다. 국민당 군에 편입해서 공산군과 싸우게 해달라는 교섭이 간 것이다.
그러나 이 제의는 진성에게 거절당했다.
이 결정을 내릴 때는 장 개석은 아직 상황이 다급하지도 않았었고 일본에 승리했던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자만심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기에 옛 군벌 군을 받아들여서 안 좋은 경험을 했던 이유도 있을 수가 있다. 또는 이런 정치 감각이 부족하다는 평을 들었던 장개석이 이 결정의 뒤에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장개석의 숙적인 모 택동의 공산군이라는 변수를 깊이 계산하지 않은 실책이었다. 올데갈데가 없어진 만주 군과 만주 경찰은 할 수없이 임 표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력이 국민당 군보다 훨씬 열세였던 임 표는 극히 실리적인 결단을 했다. 제국주의 일본 식민지의 주구 노릇을 했던 만주군과 만주 경찰들을 전력을 묻지 않고 몽땅 받아들인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들 구 만주군 병력은 현지 사정에 밝았고 지역과의 유대도 강했다. 작전이나 모병(募兵)면에서 외지에서 온 어느 부대보다도 우월한 강점이 있었다. 더구나 만주경찰의 편입은 엄청난 이점(利點)을 공산군에게 주었다.
말이 경찰이지 치안이 불안했던 만주에서 경찰은 행정조직이라기보다 군대와 비슷했던 무장 조직이었다. 만주 경찰은 괴뢰 만주국 실제 통치자 일본이 심혈을 기우려 조직했던 국가 운영 체계로서 공산군의 활동 무대였었던 산간오지까지 실핏줄같이 뻗어있는 조직체계를 가졌었다. 이 실핏줄에 되 살려서 여기에 붉은 피를 부어넣으면 실핏줄 지역은 붉은 색으로 염색되어 부활 할 것이었다.
특히 임 표에게 절실했던 모병분야[초모-招募- 사업이라고 했다]에서 이 투항한 만주의 군경 조직들이 크게 기여했다. 만주 군과 경찰의 편입한 곧 임 표의 부대는 전력(戰力)을 급속히 증강시키며 전투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수세에 몰렸던 임표의 부대가 무섭게 변신했다. 국공내전 발발 초기 단 10만 명의 작은 병력을 보유했던 임표의 부대는 만주를 거의 장악한 시점, 즉 일년 반 뒤인 장춘 함락 직후 80만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하지만 만주군경을 포섭해서 만주를 방어했더라도 중국 대륙은 이미 민심이 떠난 장개석이 계속 점령하고 있지는 못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국공내전은 장개석의 그런 참패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전은 오래 갔을 것이지만 장 개석은 남부 해안 지방 일부는 지금도 단단히 확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장개석이 만주를 장기간 확보하고 있었으면 한국 전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출처 : 한민족참역사
▣이와 비슷한 사례가 이라크에서도 일어났다. 사담 후세인의 해체된 이라크 군과 경찰이 IS로 전향해 규모가 급속도로 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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