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주의의 여파, 전략적 요충지였던 라플라타 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 우루과이 내부 정세에 대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간섭, 이 지역에 대한 영국의 경제적 관심,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파라과이 대통령의 영토 팽창에 대한 야망 등이 원인이 되어 일어났다. 파라과이는 영토 문제와 관세 문제로 인해 수년 동안 아르헨티나와 브라질과의 마찰이 잦았다.
전쟁의 결과는 파라과이의 완패였다. 삼국동맹이 재래적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전황은 장기적인 게릴라전 스타일로 바뀌었고 파라과이의 군인들과 시민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게릴라전은 1870년 3월 1일, 로페스가 사살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 추정치는 파라과이의 전쟁 전 인구의 약 90%인 120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한다. 50만 정도의 인구였다가 30만정도가 사망했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스티븐 핑커에 따르면, 파라과이 인구의 60% 이상이 사망하면서 현대의 전쟁 중 가장 참혹한 전쟁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파라과이가 전쟁의 혼란과 인구 불균형을 극복하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렸다. 남아메리카의 최초의 공화국 중 하나였던 파라과이는 1993년에서야 민주적인 대통령 선거가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브라질은 전쟁이 노예제의 종결을 불러왔고, 부채가 급증하여 갚는데 10년이 걸렸으며, 국가 경제의 성장이 급감하였다. 전쟁이 아르헨티나가 민족 국가가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쟁 후 아르헨티나는 남미에서 브라질에 이어 두 번째로 부유한 국가가 되었다. 우루과이는 이 전쟁 후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내정 간섭이 사라졌다.
로페스 이후의 파라과이 정권은 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망명을 가있던 망명자 집단이 세웠다. 그들은 로페스를 동맹군과 전쟁을 한 미친 독재자로 여겼다. 그들은 1869년 주로 브라질의 지원을 받아 임시정부를 세웠고, 1870년 파라과이의 독립 보장과 자유로운 강 항해권이 포함되어 있는 평화조약에 승인했다. 같은 해에 헌법을 반포했으나, 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기초로 만들었기 때문에 실제로 큰 효과는 없었다.
한편, 파라과이 영토를 점령하고 있었던 브라질 군대는 전쟁이 끝난 1870년부터 1876년까지인 6년 동안 파라과이에 더 머물러 있다가 물러났다. 이 기간 동안 그란차코 지역의 점령을 원했던 아르헨티나와 무장충돌의 가능성이 있었으나, 브라질 군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전쟁 중에 파괴된 파라과이의 마을들은 버려졌고, 살아남은 농부들은 아순시온의 변두리로 이주해서 파라과이 중부를 자급농업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다른 지역들은 외국인(주로 아르헨티나인)에게 매각되었고, 사유지가 되었다. 파라과이의 산업 시설들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파라과이는 영국 상품을 구입하기 위한 시장이 열렸고, 영국 파운드로 약 100만 파운드의 빚을 졌다. 사실 이 전쟁으로 이득을 가장 많이 본 것은 영국이었는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도 전쟁 때문에 엄청난 양의 빚을 졌기 때문이었고, 그 빚은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브라질은 영국으로부터의 빚을 제툴리우 바르가스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다 갚을 수 있었다.
브라질은 승리를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브라질은 런던 은행과 베어링스 은행, 그리고 로스차일드에게 빚을 졌다. 전쟁의 5년동안 브라질은 자체수입금의 2배 가량을 소모하면서 싸웠고, 재정적 위기가 왔다.
전쟁을 위해 노예들이 해방되었기 때문에, 브라질의 노예제도는 기반이 약화되었다. 브라질의 군대는 새롭게 조직화되었고, 국민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조직이 되었다. 브라질 군대는 전쟁을 통해 전통과 내부 응집력을 지닌 강한 조직으로 탈바꿈했고, 후에 국가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경제 불황과 군사력의 강화는 1889년 페드루 2세가 폐위되고 공화제 정부가 들어서게 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데오도루 다 폰세카 장군이 브라질의 첫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1975년 12월, 아순시온에서 브라질의 에르네스투 게이세우 대통령과 파라과이의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대통령은 상호 간의 우호조약에 서명했고, 브라질은 파라과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들을 돌려주었으나, 아순시온 점령 당시 찾아내 리우 데 자네이루에 있는 국립 도서관으로 옮겨던 파라과이의 국가문서들은 돌려주지 않았다.
1870년 파라과이의 패배 후, 아르헨티나는 삼국동맹조약의 조항중 하나였던 그란차코 지역의 대부분의 합병을 지키기를 강요했다. 아르헨티나 교섭자들은 파라과이의 영토를 둘로 나누어 각자 다스리자고 브라질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브라질은 이러한 요청에 두 가지 이유로 반대했는데 첫 번째, 영국과의 좋은 무역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고 (영국은 자신들에게 막대한 빚을 진 국가가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두 번째, 브라질은 파라과이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사이에서 완충국으로 계속해서 존재하기를 원했다.
결국 전쟁 후 아르헨티나는 파라과이와의 오랜 협상 끝에 결국 1876년 2월 3일 조약을 맺었으나 원래 얻고자 했던 영토의 3분의 1 정도밖에 얻어내지 못했다. 유일하게 합의점에 이르지 못했던 필코마요 강인근 부분은 미국 대통령이었던 러더퍼드 B. 헤이스에 의해 중재되었다. 브라질은 1872년 1월 9일, 파라과이와 평화조약을 맺었고 파라과이 강을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또한 전쟁 전에 주장했던 영토를 그대로 얻었다. 그 조약은 또한 브라질 정부에 전쟁 부채를 갚을 것을 규정하고 있었으나, 나중에 제툴리우 바르가스에 의해 1943년 우호의 표시로 취소되었다.
아르헨티나는 파라과이 영토의 일부를 합병하면서 라플라타 강 유역 국가들 중 가장 강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전쟁 중에 엔트레리오스 지역과 코리엔테스 지역은 브라질 군대에게 가축과 식재료, 그리고 다른 물품들을 공급했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총합하여 140,000㎢ 정도의 파라과이 영토를 합병했는데, 아르헨티나는 미시오네스 지역의 대부분과 오늘날 포르모사 주에 속해있는 베르메호 강과 필코마요 강사이의 그란차코 지역의 일부를 얻었고, 브라질은 전쟁 전부터 논쟁이 있었던 지역이었던 곳의 영유권을 얻어 마투그로수 주의 크기를 확대했다. 양측은 또 파라과이에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고 (지불되지는 않았다.) 1876년까지 파라과이를 점령했다. 한편 콜로라도당은 우루과이의 지배권을 얻었고, 1958년까지 유지했다.
3국 동맹전쟁으로 인한 파라과이의 영토 변화 : 녹색 빗금이 쳐진 부분은 3국 동맹전쟁으로 인해 파라과이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게 빼앗긴 영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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