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분쟁

차코전쟁

frog.ko 2020. 10. 10. 07:35

1932년에서 1935년까지 남미 볼리비아와 파라과이간의 전쟁이다. 두 나라의 적대행위는 이미 1928년 필코마요 강 북쪽과, 그란차코의 일부를 이루는 파라과이 강 서쪽에 위치한 광활한 초원 지역인 차코보레알(면적 259,000)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 충돌은 칠레가 볼리비아를 격퇴하고 볼리비아의 모든 해안지방을 합병한 태평양전쟁 (1879~84)의 결과에서 비롯되었다. 그뒤 볼리비아는 해안이 봉쇄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리오데라플라타(라플라타 강)를 통해 대서양 연안에 이르는 진로를 개척하려 했다.이 진로를 가로질러 그란차코가 놓여 있었고 볼리비아인들은 그란차코에 막대한 석유자원이 있다고 생각했다

 

.전쟁은 볼리비아에게 파라과이보다 훨씬 유리한 것처럼 보였다. 파라과이보다 인구가 3배나 많았고, 일의 장군 한스폰 쿤트에 의해 잘 훈련된 군대를 갖고 있었으며,미국 은행의 차관으로 구입한 충분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파라과이 정부는 제정 러시아의 장군을 고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1차대전에 참전한 베레예프 (Belaieff) 와 포르페넨코 (Porfenennko) 장군을 고용하여 전쟁을 수행했읍니다. 러나 강제로 징집된 인디언으로 구성된 볼리비아군의 사기는 낮았으며, 고산지대 출신의 볼리비아군은 열대 저지대인 차코 지역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했다.

 

반면 파라과이군들은 저지대 늪지와 정글에서 파라과이 군대에 잘 대응했다. 전후 파라과이는 그란차코 분쟁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얻었고 남서부와 북서부는 각각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가 차지했다.

 

반면 볼리비아는 파라과이 강 회랑지대와 파라과이강의 푸에르토카사도 항구를 차지하여 대서양으로의 접근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이 전쟁은 볼리비아 경제를 붕괴시켰고 곤궁한 볼리비아 일반 대중 사이에 개혁요구를 불러일으켰다. 한편 평화 조약의 체결은 주로 아르헨티나의 공으로 돌려졌으며 아르헨티나의 투자가들은 파라과이가 영토를 획득함에 따라 큰 이득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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