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튤립 뿌리 하나가 한화로 1억 6천만원 이라면...
튤립 파동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과열 투기현상으로, 사실상 최초의 버블 경제 현상으로 인정되고 있다.
당시는 네덜란드 황금 시대였고, 네덜란드에 새롭게 소개되었던 튤립 구근이 너무 높은 계약 가격으로 팔리다가 급락했다. 튤립 파동의 정점은 1637년 2월이었다. 튤립은 숙련된 장인이 버는 연간 소득의 10배보다 더 높은 값으로 팔렸다. 튤립 파동은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투기로 인한 거품이었다.
1630년대 네덜란드에서는 수입된 지 얼마 안 되는 터키 원산의 원예식물인 튤립이 큰 인기를 끌었고, 튤립에 대한 사재기 현상까지 벌어졌다. 꽃이 피지 않았는데 미래 어느 시점을 정해 특정한 가격에 매매한다는 계약을 사고파는 선물거래까지 등장했다. 뿌리 하나가 8만7000유로(약 1억6000만원)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가격이 하락세로 반전되면서 팔겠다는 사람만 넘쳐났으므로 거품이 터졌다.
상인들은 빈털터리가 되었고 튤립에 투자했던 귀족들은 영지를 담보로 잡혀야만 했다. 이러한 파동은 네덜란드가 영국에게 경제대국의 자리를 넘겨주게 되는 한 요인이었다.
튤립 버블은 South Sea Bubble(잉글랜드), 미시시피 계획(프랑스)과 함께 근대 유럽의 삼대 버블로 꼽힌다.
당시 네덜란드는 저지대 지역 가운데 가장 부유하고 증권거래소와 은행이 밀집해 있던 도시인 안트베르펀이 포함된 남부 지역이 1578년 에스파냐에 점령당한 뒤로, 암스테르담이 새로운 금융 중심지로 각광받으면서 전문인력이 대거 몰리기 시작했다. 이때문에 종교적 박해를 피해 도망 온 유대인들과 위그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막대한 자금을 들고 와서 금융업에 뛰어들었다.
1609년에 암스테르담에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설립되어 영국과의 국채 거래로만 매년 2500만 길더 이상의 수익을 얻는 등 너무 빨리 돈이 돌자, 금융업자들은 경기과열을 막기 위해 은행을 만들어 다른 사업을 펼쳤다.
얼마 안 지나 네덜란드 전역에 은행과 증권거래소가 들어섰고, 이들은 실물 상품은 물론이고 주식, 외환, 신용대출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다. 게다가 스페인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고 독일 지역에서 벌어진 30년 전쟁의 여파로 보헤미아와 체코 등의 직물 산업이 붕괴되자, 네덜란드 업자들은 독점 속에서 호황을 누렸다.
이런저런 사업 덕분에 엄청나게 불어난 자본은 다른 투자대상을 물색하기 시작했고, 이내 눈을 돌린 것이 신비의 꽃인 튤립이었다.
튤립의 원산지는 중앙아시아 톈산 산맥으로 원래 유럽에는 없던 꽃이었는데 몇 종의 튤립을 재배해 품종이 개량되면서 16세기가 되어 상인에 의해 유럽 각지에 전해졌다. 네덜란드에 튤립이 전해진 것은 1554년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오기에르 부스베크(Ogier de Busbecq)라는 사람이 오스만투르크에 대사로 파견되었다가 튤립 뿌리를 빈에 가져왔는데, 그 뿌리를 네덜란드 식물학자에게 선물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단색의 평범한 튤립은 저렴한 가격으로 거래되었지만 희귀한 튤립은 무척 비싸서, 희귀한 튤립의 보유 여부가 부의 척도로 간주되어 부유층들이 앞다퉈 희귀종을 찾았다.
그러자 희귀종을 잘 키우면 돈이 되고, 더욱 아름다운 변종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면 더욱 큰돈을 벌 수 있게 되어, 네덜란드 전역에서 튤립 알뿌리(구근) 확보 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고가주였기 때문에 서민들은 그 회사 주식을 살수 없었고, 대신에 튤립 뿌리에 덤벼들었다.
변종을 일으킨 튤립일수록 비싼 가격이 매겨지는 가운데 400여 종의 가까운 품종이 개발되었고, 서민들에게는 올라버린 가격이 부담스러웠지만 마침 이때 흑사병이 재발해 네덜란드 인구의 8분의 1이 죽자 사람들은 더욱더 격렬하게 투자하기 시작했다. 투자의 대상은 주로 알뿌리였는데, 변형에 변형을 일으킨 특이한 종자나 족보가 확실한 알뿌리는 곧 희귀품이 되었고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636년 내내 오르던 튤립 알뿌리의 가격 상승세는 1637년 1월에 절정에 달했다. 하루에 두세 배씩 오를 때가 있었고 한 달 동안 몇천 퍼센트나 상승하기도 했다. 이때 튤립 알뿌리의 가치는 정말 상상할 수도 없었는데, 1636년 당시 가장 비쌌던 "황제"라는 튤립은 하나에 2500길더였다. 이는 살찐 돼지 8마리, 살찐 황소 4마리, 살찐 양 12마리, 밀 24톤, 와인 2통(240~630리터), 맥주 600리터, 버터 2톤, 치즈 450킬로그램, 은 술잔, 옷감 108킬로그램, 그리고 침대 세트까지, 이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하지만 이 현상이 오래가지는 못했으며 1637년 2월 5일 갑자기 가격이 하락세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튤립 재배에 뛰어들자 어느덧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사람들이 '단순한 꽃을 이렇게 비싸게 돈 주고 살 필요가 있나?'고 뒤늦게 새삼 깨달은 순간에 구매자가 사라졌다. 사실상 폭탄돌리기식으로 계속 진행되었던 튤립의 거래는 알뿌리의 가격이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하자 전체적인 튤립 가격이 도미노 넘어지듯 급격하게 폭락했다.
결국 계속해서 하락세를 기록하면서 4개월 만에 최고점에서 95~99퍼센트가 빠졌고 투자자들은 본전의 1~5퍼센트만 건졌다. 세계 대공황 때 2년동안 75퍼센트가 빠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역사상 최악의 폭락세였다. 금보다 귀했던 튤립 가격이 하루 아침에 휴지 조각으로 되어버린 셈이다.
이런 혼란 사태에 직면하자 의회와 시당국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채무자와 채권자의 강렬한 로비 전쟁 끝에 "조사가 끝날 때까지 튤립 거래는 보류한다"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것은 일괄 해결로 치달았다. 계약서에 의한 계약은 일괄 무효가 되었고, 소수의 파산자와 벼락 부자를 남긴 채 튤립 마니아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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