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투르키스탄의 패권을 둘러싼 준가르 칸국과 청나라의 전쟁은 1690년부터 1759년까지 계속되었다. 1755년 청나라 건륭제는 선대 강희제의 준가르 칸국 토벌 정책을 답습하여 몽골군과 만주군을 동원해 침공을 했다.
1757년 2월에 건륭제는 오이라트인을 소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리고, 비전투원도 모두 포획하여, 남자는 죽이고, 부녀자는 할하부에 주었다. 1759년 청나라는 준가르 칸국을 평정하고, 준가르 칸국의 옛땅인 톈산산맥 북부를 접수했다. 이때 조혜와 부덕 두 장군은 각 8000의 병력을 이끌고 일리 지역의 소탕전을 치렀다. 산을 뒤져 오이라트인들을 괴멸시켰다.
청나라는 1760년 이후 일리 지방 등으로 강제 이주를 수차례 실시하였고, 1764년에는 만주의 시버족 병사에게 신강 변경 수비를 하도록 이주시켰다.
동투르키스탄이 청나라의 지배 하에 들어가 1세기가 지난 1860년대에 동투르키스탄은 세 갈래로 통치를 받고 있었다.
▣천산북로는 일리 지방을 관할.
▣천산남로는 8개 도시를 관할 (서쪽의 호탄, 야르칸드, 옝기사르, 카스 동쪽의 우츠투루판, 악수, 쿠차, 카라샤르).
▣동쪽은 우루무치 주변을 관할.
그러나 동쪽의 민정에 관해서는 감숙성의 관할 하에 있었다.
그러나 1820년에는 코칸트 칸국의 자한기르가 청나라에 의한 통치에 반발하면서 ‘호자’(Khoja)의 부활을 외치며 반란을 일으킨다. 호자는 수피의 낙쉬반디야 교단에서 유래하여 17세기 경부터 동투르키스탄 지역의 위구르인 지도자를 일컬었던 칭호로 자한기르는 아쿠타 구르크(백산당)의 호자였다.
청나라는 코칸트 칸국과 교섭을 통해 자한기르의 유폐에 성공했지만, 훗날 탈출하여 카스에 들어가 활동을 한다. 자한기르는 지지자들과 함께 카슈가르, 야르칸드, 옝기사르, 호탄을 점령한다. 청나라는 일리장군부의 장령 (창린) 섬감총독인 양우춘, 산동순무 우릉가 (무륭아), 광숙제독인 제신에게 진압 명령을 내렸다. 1827년, 악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자한기르 군대는 패배했다. 자한기르 호자는 1828년에 사로잡혀 북경으로 송환되었고, 도광제에 의해 처형당했다.
1852년, 자한기르의 아들 왈리 칸이 카슈가르에 침입하여 1857년에는 이곳을 점령한다. 또한, 왈리 칸은 독일의 탐험가 아돌프 슐라긴트바이트를 청나라 첩자로 몰아 처형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렇게 백산당의 반란이 발발하자, 청은 동투르키스탄 지역에 병력 5만을 주둔시켰고, 아홉 개의 성채를 쌓았다. 당시 일리 주둔군의 재정은 중앙 정부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1840년에 발발한 아편전쟁, 1850년부터 1864년까지 중국 전역에 확산된 태평천국의 난, 1856년에 일어난 제2차 아편전쟁 등의 전란으로 중앙 정부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결국 일리장군부는 현지에서 세금을 올렸고, 이것은 주민들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1864년 청나라가 아편전쟁-태평천국의 난으로 쇠하자 신강에서부터 감숙성-섬서성까지 분포되어 있던 이슬람교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둥간 혁명 1862~1877년)이때 코칸드 칸국의 군인이었던 야쿱벡은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위구르족의 본거지였던 타림분지에 진격하여 그곳에 주둔중이던 청나라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더욱 동진하여 1870년에는 돈황과 톈산 산맥 너머 신강의 수도였던 우루무치까지 점령했다. 그리하여 100여년 전 건륭제가 합병했던 신강은 청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야쿱 벡은 스스로 에미르라고 칭하고, 자신의 왕국을 카슈가리아 혹은 예티샤르라고 불렀다. 1865년에서 1878년 동안 존속한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과도 수교했다. 오스만은 범투르크 국가의 입장에서 카슈가리아 왕국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하고자 그를 에미르로 인정하고 군사고문까지 파견했다.
영국과 러시아 제국은 청나라를 약화시키고 중앙아시아에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할 심산으로 카슈가리아 왕국을 승인했다. 특히 영국은 인도를 통해 야쿱 벡에게 서양식 무기를 원조했고, 영사관까지 설치했다. 청나라조차 이홍장을 비롯한 해방파를 중심으로 야쿱 벡의 동투르키스탄을 자치왕국으로 인정하던가 아예 러시아에게 할양하여 그 지불금으로 해군력을 확충하려 할 정도로 위구르 포기를 진지하게 고려하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야쿱 벡은 이슬람 근본주의자였기 때문에 왕이 되자마자 선정은커녕 폭군이 되어 탈레반식의 폭정을 저질렀다. 이슬람 근본생활 방식을 위구르인, 회족들에게 강요한 것도 모자라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 원성이 높았다. 그래서 현지의 위구르들에게조차 폭군, "호로자식"이라고 증오받았다. 게다가 같은 무슬림이지만 다른 교파를 믿던 회족(둥간족)에게 지하드를 선포하여 이들을 학살하는 최악의 행위를 저질렀다. 이때문에 회족이 분노하여 청나라에게 가담했고 민심의 이반이 있었으며, 청나라 정부가 공격을 용이하게 할 수 있었다. 여담으로 일부 위구르 독립운동가들이나 이들에 동조하는 이들이 야쿱 벡 왕국을 마치 위구르족의 독립국가였던 것처럼 주장하고 있으나 야쿱 벡 자신부터가 중앙아시아에 있던 코칸드 칸국의 우즈베크족 혹은 타지크족 군인이었고 지배층이 코칸드 칸국인들이었을 뿐, 분리운동을 일으켜 타림분지에 거주하던 위구르족을 제압해 자립한 상황이었고, 오히려 위구르인들은 중과세를 매기고 탈레반식 근본주의를 실시하는 야쿱 벡을 싫어했다.
1875년 청 조정은 좌종당을 흠차대신에 임명하고 12만명의 토벌군을 보냈다. 1876년 6월 좌종당은 야쿱 벡 군을 격파하고 우루무치를 탈환했다. 7월에는 톈산북로의 야쿱 벡 군에게 다대한 손실을 주었다. 1877년 겨울 청군은 다시 남진하여 발판성을 함락시켰다.
야쿱 벡은 영국의 중재를 통해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선에서 정전하려 했으나, 이미 승기를 잡은 청군이 멈출 이유가 없었고, 투루판 지역에 대한 총공세를 펼쳤다. 또한 야쿱 벡을 지원해줄 수 있었던 러시아나 영국은 국내사정상 중앙아시아에 신경쓸 수가 없었다.
투루판이 청군에 함락되자 중앙아시아로 피했다가 1877년 5월 30일 급사한다. 음독자살이라는 설이 있으나 중풍일 가능성도 있다. 야쿱 벡이 급사하자 이후 카슈가리아 왕국은 와장창 무너졌고, 패잔병은 11월까지 모두 소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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