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섬들의 원래 주민은 아이누의 분파인 쿠릴 아이누였으나 국가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론 일본과 러시아가 초기에 어느 쪽의 영토로 상호인식하고 있었는지 애매하다. 일본은 1644년 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 시절부터 이미 일본의 영토였다고 주장하는 한편, 러시아는 자국 탐험가 알렉세예비치 포포프(Alekseyevich Popov)가 1649년에 열도를 발견하였다고 주장한다.
1855년 일본과 러시아는 러일 화친조약(시모다 조약)에서 일본의 북방 국경을 이투루프-우루프섬 사이로 정하고, 사할린(일본명 가라후토)은 양국의 공동 거주지로 삼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1875년 사할린에서 손을 떼는 대가로 쿠릴 열도(일본명 치시마 제도) 전체를 교환하자고 제안했으며, 이것이 성사되어 사할린-치시마 교환조약(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은 쿠릴 열도를, 러시아는 사할린을 가지게 되었다.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켜 러시아를 제압하고 미국의 중재 하에 포츠머스 조약을 통하여 원래 러시아가 가졌던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까지 수중에 넣었다. 이후 일본은 2차 세계 대전 동안 나치 독일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소련에게 건들지 않을테니 대신 일본이 만주, 동인도, 인도차이나를 침공하는 것에 간섭하지 않으며 서로의 영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긴 소련-일본 중립 조약을 소련에게 요구하여 1941년에 체결시킨다.
그러나 나치의 패망 이후 다시 건재해진 소련은 1945년 얄타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의 부탁으로 소일 중립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 제국과 전쟁을 선포하였는데 여기에서 미국과 영국은 전쟁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러시아가 본 전쟁을 통하여 일본 침공으로 빼앗긴 러시아의 영토권을 회복하고 쿠릴 열도를 다시 이양 받는 것을 허가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맺었다.
이후 소련은 1945년 8월 18일 슘슈 섬 전투를 시작으로 9월 3일에 쿠릴 열도를 점령하여 다시 본국의 영토로 삼는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은 미국에 소련군의 홋카이도 점령까지 타진했으나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자 쿠릴 열도 점령으로 그쳤다. 일본의 패전 이후 열린 도쿄 재판에서 일소 중립 조약은 “성의 없이 체결된 조약으로서 소련에 대한 일본의 침략 기도를 진행시키려는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라는 판결을 통해 무효화 되었으며 일본은 쿠릴 열도 전체의 영유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이 담긴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서명하였다. 정작 소련이 본인들은 조약 작성에 초대되지 않았다는 점, 일본의 군국주의 재발에 대한 대책안이 없다는 점, 그리고 일본의 가장 큰 피해국인 중국이 조약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일본이 영유권을 포기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끝내 거부하였지만 얄타 회담 때의 약속을 토대로 쿠릴 열도는 자연스럽게 소련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일본은 소련이 당시 조약을 통하여 가져간 시코탄섬과 하보마이 군도는 쿠릴 열도에 포함이 되지 않는다며 이때부터 소련에 반환 요구를 시작하였다. 이후 1960년대에는 쿠나시르 섬과 이투루프 섬 역시 역사적으로 쿠릴 열도가 아닌 일본 북방 영토에 포함된다며 이른바 북방 4도라 부르는 총 4개섬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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