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분쟁

북아일랜드 분쟁

frog.ko 2020. 12. 31. 19:58

United Kingdom은 웨일즈가 1282년 병합되어 웨일즈 왕국은 멸망하게 되고 이후 잉글랜드 왕세자에게는 웨일즈를 영지로 준다는 의미에서 시작된 ‘프린스 오브 웨일즈’라는 명칭이 주어지게 된다. (현재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아들인 찰스 왕세자도 프린스 오브 웨일즈 칭호)

 

스코틀랜드는 1707년 연합(점령이 아님, 물론 잉글랜드 왕이 지배권을 가짐)을 이루고 아일랜드가 1803년 병합되어 정식으로 대영제국이 탄생하게 된다.

 

17세기에 아일랜드를 식민지화한 영국은 전통적인 카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에 신교도들의 이주정책을 감행하였고, 이후 많은 신교도들이 아일랜드에 정착하게 되었다. 

 

1919년 아일랜드 의회가 독립을 선포했을 때 얼스터 지역은 아일랜드의 통치가 미치지 못했다. 얼스터인들은 영국군과 합세해 아일랜드와 전쟁을 벌였고, 1921년 체결된 앵글로-아이리시 조약에서 북부 6개주는 영국 연합왕국(United Kingdom)에 남았다.

 

북아일랜드의 종교분포는 신교도 41%, 카톨릭 40%로 엇비슷하다. 1949년부터 북아일랜드는 수도 벨파스트에 스토몬트(Stornont) 의회를 구성하고 총리를 뽑아 자치정부를 꾸렸다. 6개주는 연합왕국의 일원으로 영국법을 따르고 영국의회에 대표를 파견했다. 하지만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신교도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카톨릭을 믿는 아일랜드족은 소외되었다.

 

고용과 주거문제, 교육에서 카톨릭은 차별을 받았고, 선거구도 신교도들에게 유리하게 그어졌다. 신교도와 카톨릭 사이에 결혼도 관습상 금지되었고 교육과 주거지역도 분리되었다. 카톨릭교도들은 직업과 주거의 차별, 직업선택의 자유, 동등한 투표권을 주장했고, 이에 신교도들은 카톨릭교도들의 비협조적 태도를 비난했다.

 

이러한 갈등은 1960년대 들어가면서 민권운동으로 전환되었다. 1967년에는 북아일랜드 인권운동단체로 북아일랜드 시민권리연합체(NICRA)가 결성되었고, 1968년에는 학생단체가 결성되어 카톨릭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에 북아일랜드 자치정부의 테렌스 오닐(Terence O'Neill) 총리는 개혁을 약속했으나, 신교도 연방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약속이 이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영국은 신교도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북아일랜드 지역은 여전히 자신의 관할 아래 남겨두었다.

 

따라서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북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카톨릭교도를 중심으로 영국의 지배에 저항한 반면 신교도들은 계속해서 영국 잔류를 희망해 양 민족 간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북아일랜드 분쟁은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1998년 4월 10일 영국 정부와 아일랜드 정부, 북아일랜드의 각 정파가 참가해 벨파스트 협정(Belfast Agreement)을 체결하기까지 3,500 명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시켰고, 부상자를 포함한 사상자의 수는 50,000명을 훌쩍 넘는다.

왼족 상단부터 영국, 북아일랜드(얼스터 지방), 아일랜드 국기
Ulster (색상), 북 아일랜드는 분홍색으로, 아일랜드 공화국 녹색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