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사건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두 번에 걸쳐서 오스만 제국 또는 터키 정부가 오스만 제국의 영토에 거주했던 소수 민족이자 변두리 지역에 거주하던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을 집단적으로 살해한 사건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터키 정부의 아르메니아인 강제 이주가 시행되면서 수많은 아르메니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첫 번째는 압둘 하미드 2세 치세인 1894년에서 1896년에 걸쳐 행해진 집단 학살 또는 습격이었다.당시 이스탄불 등 서쪽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 전체 국토에서 아르메니아인이 집단학살됐다.
두 번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5년에서 1916년에 걸쳐서 이른바 청년 투르크당 정권에 의해 오래전부터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한 곳(대 아르메니아)의 남서쪽에서 있던 오스만 제국령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아르메니아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대부분의 아르메니아인이 희생됐다.
두 번째 박해에서는 대부분의 아르메니아인이 조직적으로 집단 학살돼 약 백만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대개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이라고 하면 두 번째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박해 배경에는 오스만 제국에 있던 아르메니아인 사회는 아나톨리아 동부에 거주하던 농민들의 농촌 사회와, 이스탄불 등의 도시에 거주하는 상인들로 구성된 공동체로 나뉘어져 있었다.
후자는 무역이나 금융업으로 성공해 부유한 상인층을 형성했고, 건축가나 조폐관 등의 직무로 들어가면서 궁정·중앙 행정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많았다.
19세기로 들어가면서 아르메니아인과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교도 사이에 문제가 나타났다.일부 부유층 사이에서는 서구와의 교류를 통해서 민족주의에 눈을 뜬 사람이 생겨났지만, 여전히 커다란문제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러시아 제국이 남카프카스를 점령했고, 1877년에 일어난 러시아-튀르크 전쟁으로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대의 북동부를 점령하던 상황이 발생하면서 결정적인 변화가 생겨났다.
러시아는 1878년의 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 디야르바키르, 시바스 등 일대의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의 아르메니아인 권리 향상을 목표로 한 개혁 실시를 약속했다.
이것을 계기로, 오스만 제국령 내에서는 아르메니아인 민족 운동이 시작됐고, 제국 밖에서는 아르메니아인 민족주의자들이 훈체크, 다시나쿠시툰(다시나크파) 등 아르메니아인의 독립을 목표로 삼은 정당이 결성됐다.
한편, 러시아-투르크 전쟁이 한창일 때 러시아 점령지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한 무슬림 난민들로부터 기독교 아르메니아 인이 러시아 군대와 협력하면서 무슬림을 몰아내는 소문이 퍼졌다.
이로 인해 도시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과 터키인·쿠르드족 사이에서 적개심이 높아졌고 오스만제국인의 무슬림들이 아르메니아인을 외국과 내통하고 테러를 벌이는 위험 분자로 보게 되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은 동맹국 측에 가담하는 것으로 결정했는데, 연합국측의 러시아군은 오스만 제국의 동부 국경을 점령했다.이때 오스만 제국 측의 아르메니아인 수 천명은 러시아군으로 참가하거나, 게릴라 활동을 했다.
아르메니아인 게릴라로 인해 무슬림 마을이 습격됐고, 무슬림이 살해된 사건도 일어났다. 아르메니아인 게릴라들의 행동은 오스만 제국 내의 반아르메니아인 감정을 지폈다. 혼란에서 살아남은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럽 연합이나 미국으로 이주했고, 오스만 제국령 동부 아나톨리아에 있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는 완전히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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