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은 유럽인들이 이슬람교도들을 상대로 벌인 일련의 군사원정(1095~1270)으로 기사단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십자군 3대 기사단은 '성 요한 기사단', '성전 기사단', '튜튼 기사단'이다. 성 요한 기사단은 의료를 겸하는 구호 기사단이었고, 탬플 기사단은 이슬람에 가장 적대적인 기사단이었다. 튜턴 기사단은 독일 기부단체에서 시작된 기사단이다.
이들은 십자가라는 공통 문양을 가지고 있었고, 색의 조합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이 세 종교 기사단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매우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집단이었다. 십자군 전쟁에서 십자군 중 가장 용감히 싸웠고 이슬람 군에 가장 큰 타격을 준 것은 사자왕 리처드 같은 국왕이 이끄는 군대가 아니라 이러한 종교 기사단들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종교기사단이 없었더라면 십자군 전쟁은 진작에 끝났을 것이다. 광신적인 이슬람교도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똑같이 광신적인 이들 종교 기사단들뿐이었다.
이외에도 프랑스에는 '성 미카엘 기사단'이라는 종교 기사단이 있었는데 그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유명한 '체사레 보르자'가 이 기사단의 단원이었습니다. 체사레 보르자가 이 기사단의 단원이 된 것은 프랑스 왕 루이 12세와의 정치적인 관계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가장 강대하고 유명한 기사단을 꼽으라면 앞서 말한 3대 종교 기사단을 꼽을 수 있다.
▣ 몰타기사단(구호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
▣ 독일 기사단/튜튼 기사단(리보니아의 검은 기사단 흡수)
▣템플 기사단
그 이외에도 산티아고 기사단, 검은 형제 기사단 등의 종교 기사단등이 있다.
◐ 템플 기사단
템플 기사단은 1096년 제1차 십자군의 활약을 기초로 확보된 예루살렘으로의 성지 순례를 떠났던 많은 유럽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1129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공인받게 되면서, 기사단은 유럽을 횡단하여 온 성전지에서 구호금을 통해 엄청난 기부와 이를 밑천으로 금융이자 증식으로 당시 유럽 최고의 부를 쟁취했다. 기사단원들은 그들만의 특징적인 복장인 붉은색 십자가가 표시된 하얀색 겉옷을 입었으며, 대부분 십자군 전쟁의 격전지에서 활동했다.
성전 기사단의 성공은 십자군 운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십자군이 결국 패배하여 성지를 도로 빼앗겼을 때, 성전 기사단을 위한 지원도 약해졌다. 성전 기사단의 비밀 입단식에 대한 루머가 만들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의심을 사게 되었으며, 기사단에 큰 빚을 진?프랑스의 필리프 4세는 엄청난 기사단의 재산을 탐내어, 왕은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1307년에 이르러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왕권 신장의 수단으로 이들을 이단으로 간주,프랑스 각지에 있는 3,000여 수도원의 회원들을 모두 체포하고 재산까지 몰수한 뒤 6년간 이단 심문을 단행하여 모두 몰살 시켰다.
1307년 프랑스 내 기사단원의 대부분이 체포당한 뒤, 거짓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고문을 받은 다음 화형에 처해졌다.
1312년 필리프 왕으로부터의 계속된 압력에 클레멘스 교황은 결국 굴복하여 기사단 에 해산령을내렸다. 유럽의 주요한 경제단체가 한순간에 사라지자 이후 많은 의견과 전설이 생겨났다.
기사단은 해체되었으나, 화형을 당한 이들은 100여명이었다. 조사받은 자들은 1만명이 넘었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은 기사단의 잔여 세력이 계속 잔존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잔존하였다는 이야기는 그들이 엄청난 비밀을 간직하고 지하에 숨어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로 확대되었다. 실제 그들은 중세 시대의 큰 흐름을 이끌어갔고, 교황의 공식 기사단이었던 만큼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 이야기는 확인된 것이 없다. 사람들은 이들의 생존자가 신비단체이자 반기독교 단체인 <프리메이슨>의 기원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요한 기사단
몰타 기사단은 1080년 성지를 순례하는 순례자들을 위해 예루살렘에 세워진 아말피 병원에서 시작된 종교기사단의 이름이다.지역에 따라, 병원 기사단, 구호 기사단, 로도스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예루살렘 정복(1099년) 이후 로마 가톨릭의 군사적인 성격을 띤 기사단으로 성지와 순례자들의 보호를 위한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팔레스타인에서 기독교 세력이 축출된 이후 기사단은 로도스 섬으로 근거지를 옮겼으며, 1522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로도스 섬에서 쫓겨나서는 다시 스페인 관할의 몰타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몰타 섬에 자리잡고 주권까지 있는 나라였지만 178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끈 프랑스군에게 정복당했다.그러나 몰타 기사단은 그 이후에도 살아남아 현재도 로마에 본부를 두고 존재하고 있으며 독자적인 헌법과 법원 등 독립국으로서 갖춰야 할 요,소들을 영토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요소들을 갖추고 있고, 현재까지 국제법 상 주체로 인정 받고 있다.
◐ 튜튼 기사단
튜턴 기사단 또는 독일 기사단은 오스트리아의 빈에 본부를 두고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소속된종교기사단이다.
튜턴 기사단이란 이름은 중세 십자군 원정 때 주로 독일인 기사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튜턴 기사단은 1237년, 리보니아(Livonia)의?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을 흡수하고 프로이센에서 에스토니아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했다.이후 러시아 정교회 지역을 로마 카톨릭교로 개종시 키려고 시도하였으나 1242년 노브고르드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에게 패배하여 좌절됐다
14세기에 들어와서 기사단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연합군의 위협을 받았다.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1410년?7월 15일 그룬발트 전투에서 튜턴 기사단을 대패시켰다.
1525년 기사단장 알베르트는 폴란드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루터교로 개종하면서 프로이센의 영토를 상실했다.
이후에도 리보니아와 신성 로마 제국에 몇몇 영토가 남아 있었으나 곧 리보니아도 잃고 몇몇 기사단령이 남아있었지만 180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완전히 해체됐다.
나폴레옹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은 1834년 기사단을 다시 부활시켰고 1929년에는 완전히 정신적인 명예 카톨릭 단체로 변신했다.현재도 기사단원은 명예직으로 남아있으며 빈에 본부를 두고 있다.
●산티아고 기사단
12세기에 갈리시아와 스페인의 수호성인인 사도 야고보의 이름을 따서 만든 기사단. 순례길을 지키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 세력을 몰아내는 레콩키스타가 주된 목적이었다.
인지도나 규모는 산티아고 기사단이 가장 크지만 이뿐만 아니라 같은 카스티야 기반한 칼라트라바 기사단, 아라곤 왕국 기반의 몬테사 기사단, 포르투갈 국경지대 중심의 알칸타라 기사단, 이 4개 기사단은 현대까지도 스페인 왕실이 부여하는 명예 기사작위 단체로 존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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