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와 부룬디는 후투족이 80%에 가까운 인구비를 차지하며 투치족의 인구비율은 10%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용맹한 전사들로 유명한 투치족이 15세기무렵 이 지역으로 남하에 온 이후 투치족은 귀족집단으로 군림하게 되고, 다수 후투족은 소수 투치족에게 통치를 받게 된다.
르완다 내전은 소수파로서 지배층을 형성해 온 투치족과 다수파 피지배계층인 후투족간의 정권 쟁탈을 둘러싼 갈등이다.
양 부족은 외모 및 문화관습상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투치족은 15세기 나일강 유역에서 남하한 호전적인 유목민 출신으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온순한 성향을 보유한 후투족을 지배하여 왔다.
벨기에의 식민통치를 거쳐 소수 투치족에 의한 다수 후투족의 지배는 고착화되었다. 1962년까지 르완다를 위임통치한 벨기에는 소수부족인 투치족(14%)을 우대하여 지속적으로 지배계급으로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고, 다수부족인 후투족(85%)을 통치시켰다.
1962년 7월 독립후(초대 대통령G.Kayibanda)에도 투치족은 후투족을 강압 통치해 오면서 1963년 12월 후투족에 의해 약 2만명의 투치족이 희생당한 학살사건을 계기로 양대 부족간의 갈등이 심화 되어왔다.
1973년에는 후투족(J. Habyarimana 소장)이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인수, '75년에 <국가발전혁명운동당, MRND>를 설립하여 일당독재 정부를 구축하였다.
Habyarimana는 MRND 주도에 의해 '78, '83, '88년에 일당독재 체제하에서 대통령으로 선임되어 소수 투치족을 억압해 왔다. '90.6월 하비야리만다 대통령은 다당제 민주주의 실천의도를 선언하였으나, 10월부터 난민화된 투치족은 RPF(르완다 애국전선)을 조직하고, 주변국인 우간다, 탄자니아를 거점으로 정부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함에 따라 내전이 본격적으로 발발하기 시작하였다.
르완다 사태를 악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는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의 하비아리마나 당시 대통령이 암살 당함에 따라 이에 투치족이 개입한 것으로 간주한 대통령 경호원들을 중심으로 한 후투족들(Interahamwe극우 후투군 조직)이 4월 7일 투치족 출신의 총리와 3명의 각료 및 벨기에 평화유지군 11명을 살해하고 투치족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시작되었다.
후투족이 투치족을 무차별 학살한 것에 대해 투치족 반군인 RPF가 후투족 중심의 정부를 공격함으로써 부족항쟁이 일거에 발생되었다. 정부군(후투족)과 반군(투치족)의 갈등이 민간인에 대한 보복 행위로 이어져 대량학살 및 탈출사태가 발생하였다. 1994년 4월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의 전으로 약 2만명이 살해되었다.
내전을 통해 투치족 반군이 수도 키가리를 제압하고, 7월 18일에는 프랑스군이 주둔한 서남부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을 장악하는 등 승리함에 따라 투치족 난민은 귀환을 개시하였다. 1994년 7월 23일 정권을 잡은 투치족 반군은 르완다 신 정부를 출범시키는 한편 후투족 온건파인 비지뭉구와 트와기라뭉구를 각각 대통령 및 총리에 임명하는 등 부족융화정책을 실시하였다.
투치족 신 정부는 카가메 중장이 부통령과 국방장관으로서 실권을 쥐고 정치적 안정의 유지를 꾀하는 한편, 이웃 자이르 등과 난민문제 협상, 후투족 구정부군의 무장해제 및 난민귀환 등을 협의하였다.
한편 구후투족 정부의 주요 인사 및 구정부군 3만명은 자이르의 고마지역에 피신하여, 1994년 10월에는 고마 난민촌을 장악하였다.
1994년 11월에 동 난민촌에는 신디쿠브와브 전대통령을 수반으로 한 망명정부가 수립되어, 후투족 난민들은 구정부군 출신 게릴라에 편입시키는 등 병력을 보강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후투족 구정부군은 망명지인 자이르에서 다시 르완다로 월경하여 1995년 1월 11일 남서부지역인 냐마새크에서 정부군과 전투를 재개하였다.
투치족의 승리로 인해 후투족 주민 250만명과 구정부군 3만명이 보복을 우려하여 인근 자이르 동부 및 르완다 남서부의 안전지대로 도피하였다. 내전 동안에 투치족이 우세해지자 후투족 시민들은 보복이 두려워 필사적으로 탈출하였는데, 이후 난민 130만 명이 1996년부터 귀환하였고 모든 분야에서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2000년 3월 후투족 출신의 대통령 비지문구가 사임하고 4월에 투치족 출신인 폴 카가메(Paul Kagame)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양 종족간 갈등이 재연될 가능성은 아직도 남아 있다.
부룬디는 16세기부터 독립 왕국으로 존재하였다. 1903년 부룬디는 독일 식민지가 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 벨기에에 넘어갔다.
부룬디는 독립 이후 줄곧 투치족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1972년에는 투치족의 학살로 200,000명의 후투족이 희생당했다. 1993년 부룬디의 첫 번째 민주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인 은다다에(Melchior Ndadaye)는 후투족이었으나 헌법상 유고시 대통령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어있던 투치족 군 장교들이 그를 암살했다.
이는 결국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내전을 불러일으켜 800,000명의 부룬디인들이 죽었다. 먼저 투치족에 의한 무차별 학살이 있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후투족에 의한 학살이 일어났다.
은다다예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은 무수한 투치족 시민들을 학살하였다. 투치족 위주의 군대는 비슷한 수의 후투족을 학살하는 것으로 응수하였다. 이러한 불안정의 시기는 1996년 이전 대통령 피에르 부요야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을 때까지 이어졌다.
2000년 8월, 두 개의 정치 그룹을 제외한 모두가 동의한 평화 협상은 민주정치의 부활을 위한 일정을 계획하였다. 수 년의 폭력이 더 계속된 뒤에, 2003년 부요야의 정부와 가장 큰 후투족 반군 그룹인 CNDD-FDD 간에 휴전이 조인되었다. 그 후 FRODEBU 지도자 도미티엔 은다이지예는 부요야의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러나 가장 극단적인 후투족 그룹 Palipehutu-FNL 은 아직 협상을 거부하였다. 2005년 5월, FNL과 부룬디 정부간에 마침내 휴전이 합의되었지만 전투는 계속되었다. 재개된 협상은 FNL이 무기를 내려 놓는 댓가로 포괄적 사면을 요구할 것이라는 우려 속에 현재 진행 중이다.
2005년 중반의 일련의 선거에서 이전의 후투 반군인CNDD-FDD가 승리하였다.
※원래 르완다와 부룬디는 후투족과 투치족 둘로 나뉘지 않고 여러 부족들이 각자 살아가던 원시사회였다.
물론 당시에도 투치족이나 후투족, 트와족 간의 구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양반-평민-천민의 구분처럼 영향력이 약한 신분제에 가까웠거나, 혹은 옆에 있는 부족 마을 정도의 취급이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건 후투족은 농사를 짓고 투치족은 가축을 기르던 부족이었다는 것과 투치족이 후투족보다 키가 큰 진짜 이유는 혈통이 달라서라기보다는 우유와 고기를 많이 섭취해서였다는 점이다.
거기다 이들은 언어와 문화와 풍습도 어느 정도 공유했기에 이질감이 다른 쌩판 다른 부족들끼리 묶이던, 아프리카의 여타 국가와 다르게 잘만 했으면 이들은 하나의 부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도 있었고, 더 나아가 르완다와 부룬디는 한 나라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곳을 식민지로 접수한 벨기에가 식민지 내의 부족들이 한데 뭉쳐 저항하는 걸 막기 위해 일부러 모호한 기준을 가지고 부족들을 분류하고, 또한 이를 기준으로 차등 대우하면서 재앙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벨기에는 투치족 출신 왕들을 내세워 후투 족장을 강제로 폐위하고 후투 왕국을 해체했으며, 토지 개혁 명목으로 후투족의 땅을 몰수하고, 소수 상류층인 투치족과 다수의 후투족을 차별하는 정책으로써 후투족과 투치족을 분열하게 해 르완다와 부룬디 지역을 유효하게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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