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토가 정말 작아서 그 소국이라는 이스라엘의 영토 반밖에 안되며 대략 경기도와 비슷하다. 페니키아의 직계 후손이다.
지중해에 접해있는 좋은 위치 덕분에 옛부터 좋은 무역항으로 발전을 거듭했다. 그래서 "중동의 진주" 라는 별명도 있다.
본국보다 해외에 나가 있는 인구가 더 많은 민족으로 흔히 유대인과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인을 꼽지만, 사실 레바논이 저 셋을 뛰어넘는 끝판왕이다. 이스라엘과 아르메니아는 일단 본국 인구가 더 많고 세계 각지의 해외인구를 모두 합쳐야 본국 인구보다 많은 거지만 레바논은 본국이 600만인데 비해 브라질에만 무려 700만 명(?)의 레바논계 브라질인들이 산다.
브라질에 유독 많이 살지만 아메리카 다른 국가들에도 많으며 오스트레일리아 등에도 많은 수의 레바논인이 거주하고 있다. 그래서 레바논인 중에 무려 75% 정도가 나라 밖에 산다. 또한 코트디부아르와 라이베리아, 모잠비크 등 아프리카의 여러 빈곤한 나라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고대에는 전국이 백향목 숲으로 덮여 있었으나 현재 숲은 국토의 약 13.4%만을 차지하며 건조한 여름철에 산불이 잦아 골칫거리라고 한다. 오랜 개발로 국가의 상징과도 같은 백향목이 거의 남아나지 않았으나 최근 꾸준히 숲을 복원시키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레바논은 수십여 종파가 공존하는 다종교 국가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주된 종파는 마론파(가톨릭 기독교)와 수니파 그리고 시아파이다.
그래서 기독교 축일과 이슬람 축일이 나란히 공휴일로 지정되고 있다. 축일이 각 종파별로 날짜가 다를 경우에라도 공휴일로 지정하기 때문에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을 각각 두 번씩 쉬고 있다. 금요일은 평일이고, 일요일은 주말 휴일이다.
그래서 금요일에는 점심시간을 늘려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배려하고 있다. 다양한 종교로 인해 공식적인 인구 조사는 1932년 이후 실시되지 않고 있으며 복잡한 종파 구성과 통계 산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추정되는 바에 따르면 무슬림 인구 수가 54%으로 과반을 차지하며, 기독교도 역시 40%를 넘어 비율상으로 따지면 중동 제1의 기독교 국가이다.
이슬람에서 이단 취급받는 소수종파 드루즈교인 역시 20만명 넘게 살고 있다. 종파간 비율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기독교는 마론파가 다수인 가톨릭교회가 약 26%, 정교도가 8%,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개신교 등 기타 소수 기독교 분파가 6.5% 정도를 차지한다.
이슬람의 경우는 수니파 인구가 27%, 시아파 인구가 27%정도로 비슷하게 양분하고 있으며 시아파 내부적으로는 알라위파와 기타 시아파 분파들로 또 갈라진다. 여기에 일단 레바논 인구에 집계되는 국민은 아니지만, 최근 레바논으로 들어왔던 대부분이 무슬림인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난민 150만여 명을 포함하면 무슬림 비율은 더 높아진다.
시리아에서 온 난민들은 기본적으로 수니파와 정교회 교도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여타 종파에서 위기감이 돌고 있는 중. 물론 3대 종파에 밀려 세가 약했던 정교회 측에서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사실 원래 오스만 제국 시절인 1913년 레바논의 인구 41만 명의 대부분(79.5%)이 기독교도였고, 무슬림은 9.1%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오스만 제국 멸망 이후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면서 무슬림이 다수인 베카 계곡 등이 레바논에 편입되다 보니, 기독교인의 비율은 51%로 떨어지고, 무슬림의 비율이 49%까지 올라갔다.(1932년 센서스) 이후 기독교인들이 대거 해외로 유출[6]되고 난민을 받는 등의 결과로 기독교-이슬람 인구가 역전된 것이다.
다만 51%라는 비율은 기독교도들을 지원해 레바논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고자 했던 프랑스 위임통치 정부가 1932년 조사 당시 외국에 있는 레바논 기독교도들까지 포함시켜 실상을 조작한 것이다. 그 결과 인구 79만 3226명 중 기독교도가 39만 6746명으로 여타 집단보다 250명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실상은 기독교도와 무슬림 비율이 같거나 후자가 살짝 우세한 것이었다. 프랑스 당국은 이러한 각색된 결과로 레바논 의회의 의석 배분에 있어 기독교도와 무슬림 비율을 6대 5로 설정하였고, 이는 독립 후에 그대로 적용되어 사실 5보다는 6에 가까웠던 무슬림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내전의 씨앗이 되었다. 천년 이상 공존하던 레바논의 아랍인들이 십자군 이후 최초로 종교를 따라 대립하게 된 것이다.
레바논 내전은 1975년 부터 1990년지 레바논에서 일어난 내전이다. 15만명에서 23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인구의 1/4인 백만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35만명이 난민이 되었다.
레바논내에 세력이 커진 회교도들은 국가 평의회에서 점차 더 권리와 이익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더부살이 하는 PLO는 이들 활동의 기수에 서게된다.
기독교파와 회교도간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양측이 총질을 해대는 사태로 발전하고 마는데 1975년 4월 13일 PLO게릴라들이 베이루트의 한 교회당을 기습하여 다수의 기독교도들을 살해하였고,이에대한 기독교도들로 구성된 팔랑게 당의 지도자 피에르 제마엘이 이끄는 기독교 민병대가 즉각 보복공격을 감행하는 거으로 레바논은 내전의 아수라장으로 빠져든다.
처음에는 회교도와 기독교간에 시작된 이 분쟁은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그 양상이 복잡해져서 급기야는 기독교파와 또 다른 기독교와, 수니파 회교도와 시아파 회교도들끼리 서로 치고받는 혼전으로 발전한다.
이 난리통에 유명무실해진 정부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아보려는 각 정치조직들은 저마다 준 군사 조직인 민병대를 양성하여 이 내전에 뛰어들었고, 그 결과 50여개의 민병조직이 난립하게된다.
시리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레바논은 원래 자기네 영토였다는 생각에 시리아군은 전차를 동원하여 레바논으로 진격해 들어간다. 하지만 시리아군은 기독교 민병대가 아닌 같은 회교도인 PLO를 향해 진격을 하고, 이 내전의 전체 희생자 8만명중 30%인 PLO희생자가 시리아군에의해 발생하게된다.
왜냐하면 PLO의 지원을 받은 회교도세력이 승리할 경우 레바논은 당연히 이스라엘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고 만일 이들과 이스라엘이 마찰을 빚는다면 당연히 시리아에도 불똥이 튀어오기 때문이었고 같은 회교도라하더라도 PLO가 가세한 레바논의 회교도는 급진 시아파로서이들은 시리아의 집권세력인 순니파와는 정치노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내전이 종결된 것은 1976년 11월이고 레바논에는 내전의 재발을 막기위한 약 3만여명의 아랍평화유지군이 주둔하게 되는데,사실은 그 병력 대부분이 시리아군으로서 결국 시리아가 레바논을 무력 점령한 것과 다를바가 없는 상황이 된다.
하지만 레바논 남부 지역은 이스라엘과 국격을 맞대고 있었으므로 시리아는 이스라엘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이지역에는 군대를 배치하지 않았고 그결과 시리아군의 통제권을 벗어난 이 남부자역에서는 여전히 기독교 민병대와 PLO 게릴라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시리아와의 전투 와중에 PLO의 포탄은 지척거리의 이스라엘 영토로 날아들었고, 이스라엘군은이에 대한 보복으로 레바논 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폭격을 가한다.
이러한 난립을 잠재우고 종파 간의 균형을 이루고자 1990년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은 기독교,총리는 이슬람 수니,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그리고 국방장관은 드루즈파로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러나 기독교와 이슬람,그리고 이슬람은 다시 수니와 시아로 나뉜 복잡한 레바논 사회는?사분오열된 무장정파들의 끊임없는 갈등과 충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레바논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중동 최고 갑부들이 가장 선호하는 휴양지이며 좁고긴 레바논 지형을 따라 지중해의 온화한 기후와 빼어난 경치가 고대로부터 귀인들을 끌여들였고 레바논을 중동의 파라다이스 또는 중동의 관문이라 부른다.
한국의 동명부대가 UN평화 유지군으로 현재 주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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