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는 영국인후손이 가장 많을것 같고 아르헨티나는 스페인후손이 가장 많을것 같지만 실상은 미국은 독일계 민족이 가장 지역이다.
18세기 까지는 영국 출신들이 미국에 가장 많았다. 80% 이상이었지만 19세기 들어서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 바람이 분다. 그때 독일인들과 아이리쉬들이 몇백만 이상이 건너온다. 그래서 현재 미국인 중에서 독일계 혈통이 가장 많다.
미국 인구에서 약 5천만 명, 곧 약 17%를 차지하며 미국에서 가장 큰 민족단이다. 오하이오주, 아이오와주, 미네소타주, 위스콘신주, 네브래스카주와 다코타 지방을 포함한 중서부 지방 상류 주들이 3분의 1 이상의 가장 높은 독일계 미국인들의 비율을 가지고 있어도 캘리포니아주, 텍사스주와 펜실베이니아주가 독일계 주민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편이다.
2010년 미국 인구조사국에 의하면 독일계 미국인이 총 미국 인구의 17.1%를 차지하며, 아일랜드계 미국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잉글랜드계 미국인을 앞서 가장 큰 조상 전래의 민족 단체를 형성하였다.
역사적으로 독일이 해외 식민지들을 가지지 않았고, 1680년대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들에 첫 독일인 이민들이 도착하여 펜실베이니아와 뉴욕 지역에 주로 정착하였다. 독일인들의 이민은 19세기 동안에 8백만 명의 가장 큰 수로서 지속됐다. 그들은 대지의 인력과 종교적 자유에 의하여 당겨졌고, 대지의 부족과 종교적 및 정치적 압박에 의해 유럽의 외부로 밀려났다.
미국에 도착한 많은 이들은 종교 및 정치적 자유를, 어떤 이들은 유럽보다 더 나은 경제적 기회들을, 다른 이들은 신대륙에서 간단히 깨끗하게 시작되는 기회를 위한 길을 찾았다. 1850년 이전에 도착한 이민들은 자신들의 강한 농장 기술을 지불할 만한 가장 생산적 대지를 찾은 농부들이었다. 1840년 후에 많은 이민들은 독일어 사용 구역 "게르마니아"가 곧 생긴 대도시들에 왔다.
독일계 미국인들은 미국에 첫 유치원을 설립하였고, 크리스마스 트리 전통을 소개하였으며, 핫도그와 햄버거 같은 인기있는 미국식 음식들을 창설하였다.
독일계 미국인들의 축하식은 전국을 통하여 열리고, 뉴욕에서 매 9월마다 세 번째 토요일에 열리는 독일계 미국인 슈토이벤 행렬식이 가장 잘 알려진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시카고, 신시내티, 밀워키, 세인트루이스와 다른 도시들에서 해마다 열리는 주요 이벤트들이 있다. 미국에 온 다른 이민들처럼 압도적인 독일인 혹은 독일계 주민들은 본질적으로 미국화되었다.
▣나치의 남미 도주
제2차세계 대전이 끝난 후 수많은 나치 전범들은 공소시효 없이 영원히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 외에도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당시 완전포위되어 바다를 통하여 탈출한 독일인들 중 상당수가 독일본토가 아닌 남미로 항로를 잡아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은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나치 전범들도 순순히 잡혀 줄 마음은 없었고 연합군의 추적을 피해 신분을 세탁하고 각국으로 도주했는데 주로 남미가 주 도피처가 되었다. 남미가 주 도피처가 된 이유는 남미 국가들이 제2차 세계 대전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고 미국이나 유럽, 소련의 영향력이 비교적 미미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일부 남미 국가들은 나치 인사들의 송환에 비협조적이기도 했다.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이던 후안 페론과 칠레의 대통령이었던 가브리엘 곤살레스는 나치 인사들에게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받고 숨겨 주거나 나치 전범과 부역자의 자국 망명을 묵인하기도 했다. 게다가 당시 이를 지휘했던 장관이 다름아닌 전직 우스타샤 전범 안테 파벨리치. 덕분에 구드룬 부르비츠, 오토 슈코르체니, 한스 울리히 루델, 알로이스 후달같은 친나치 인사이나 전범은 아닌 이들의 지원과 더불어 수많은 전범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19세기 초반부터 독일인 이민이 많았으며,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 고국의 사정에 절망한 독일인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군이 쳐들어온 동프로이센을 배를 이용해 탈출한 독일인들이 많이 이민을 갔기 때문에, 그리고 넓은 땅에 비해 인구수가 많지 않고 미개발지도 상당히 많은 편이어서 나치 인사들이 숨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특히 남미 중에서도 95%로 백인의 비율이 높아서 백인인 자신들이 숨어살 수 있었고 또한 백인우월주의에 찌든 인간들의 눈에 보기에는 당시로서는 미국과 유럽 등을 제외하면 '그나마 나은' 문명 세계이기도 했다. 그중 부유했던 아르헨티나가 주 도피처로 선택되어 수많은 나치 전범들이 도주하게 되었다. 특히 아르헨티나에 숨어 지내다 잡힌 아돌프 아이히만의 사례가 매우 유명하다. 체 게바라가 의대생 시절 남미를 여행하던 중에 한 집에 하켄크로이츠 깃발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곳에 살던 사람이 도망친 나치 인사였다고 한다.
독일 나치 전범들만 간 것은 아니고, 많은 수의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 파시스트들과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우스타샤, 독일 국방군 점령 시기 나치 독일군에게 협력하던 유럽 국가들의 매국 부역자들도 많이 따라갔다. 비슷하게 몇몇 일본군 잔당들은 브라질로 도주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브라질이 친추축 국가라는 의견이 나오는데, 브라질은 약간 경우가 다르다.
위의 주석에 언급되었듯이 아르헨티나처럼 연합국에 이름만 올려 놓은 게 아니라 잠수함에 지상군까지 투입해서 추축군과 싸우던 국가이다. 당장 전후 브라질의 독재자였던 카스텔루 브랑쿠부터가 2차 대전 당시 참전으로 이름 좀 날리던 양반이다.(물론 그와 별개로 윗 주석에 써놓듯이 통치방식에 있어서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건 사실이다.) 당연히 이들에 대한 시선은 별로 좋지 않았다. 일본군 잔당들이 굳이 브라질로 피신한 까닭은 브라질에 일본계 후손들이 많이 살기 때문에 섞이기 쉽기 때문으로, 지금도 일본 이외에 세계에서 일본계 주민들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가 미국도 아닌 브라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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