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타르족의 의미
1. 타타르족 Tatar族 : 몽골족 가운데 한 부족(部族). 또는 몽골족을 통틀어 이르는 말.
2. 타타르족 Tatar族 : 러시아 내의 튀르크계 여러 종족을 통틀어 이르는 말.
타타르는 12세기 몽골 고원의 주요 다섯 부족연맹체(몽골, 케레이트, 메르키트, 나이만, 타타르) 중 하나이다. "타타르"라는 이름은 732년경 물건인 돌궐의 퀼테긴 비문에 처음 나타난다. 비문에 보면 “타타르 30부족 연맹”이라는 뜻의 “오투즈 타타르 보둔”이라는 말이 나온다.
타타르인들은 5세기에 고비 사막 북동쪽에 살다가 10세기 거란의 요나라에 신종했다. 요나라가 멸망하자 금나라의 지배를 받았으며, 금나라는 타타르가 다른 몽골 부족연맹들과 싸우도록 뒤에서 조종하였다.
그 결과 타타르는 몽골의 암바카이 칸이 금나라에 잡혀가 죽는 데 공헌하였고, 몽골과 원수지간이 되고 만다. 이 시기 타타르는 후룬 강과 부이르 강 유역의 비옥한 지대에서 유목했으며, 중국으로 가는 무역길을 틀어쥐고 있었다.
몽골 제국이 성립된 뒤 타타르는 몽골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이후 칭기스 칸의 손자 바투 칸은 타타르인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 결과 몽골의 침략을 받은 서양,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는 몽골(이 경우 킵차크 칸국)을 싸잡아 "타타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타타르족"이라 하면 12세기의 타타르 연맹과는 별 관계 없이 오늘날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역에 정착한 튀르크계 무슬림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현대의 타타르족은 볼가 불가르, 킵차크인, 쿠만인, 튀르크화된 몽골인(노가이인)들의 혈통이 섞여 있다.
협의의 타타르
타타르 부족은 돌궐 제국 시기부터 명칭이 확인되는 실위계 부족으로, 몽골 등과 함께 몽골 고원에서 자리잡고 사는 여러 부족 가운데 하나이다. 북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실위계 부족 중에서 가장 먼저 몽골 초원으로 이주한 세대인 타타르는 점차 성장해 부족 연맹으로 발전했으며 이는 키르기즈인들이 9성 타타르의 나라(Toquz Tatar Eli)라고 부르거나 송의 사신 왕연덕(王延德)이 구성 달단(九性 韃靼)이라 부른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초원으로 이주한 타타르는 돌궐, 위구르 제국과 충돌하거나 이들에게 복속되어 살았으며 요가 성립한 이후부터는 요의 속부가 되었다.
요에서는 몽골 초원의 실위, 투르크계 민족들을 모두 조복(阻卜)으로 불렀기에 타타르도 이 시기에는 조복의 한 일파로 간주받았고 송에서는 타타르를 달단이라 칭하거나 백달단(白韃靼)이라 부르는 옹구트 부족과 구분지어 흑달단(黑韃靼)이라 불렀다.
타타르는 옹구트, 운기라트 부족과 마찬가지로 영토 안에 비단길의 하나인 초원길이 지나고 있어 경제적으로 많은 이득을 취했으며[7] 지리적으로 선진국인 송, 요, 서하와 가깝다는 이점 덕분에 다른 몽골 부족들보다 기술력이나 문화 수준이 높았다.
정치적으로 타타르는 요 조정에 인질을 보내고 조공을 바쳤으며 요를 위해서 군대를 제공했다. 반대로 요는 그 대가로 절도사나 상온, 대왕, 태사와 같은 요의 관직을 수여하고 조공 무역을 개시해 타타르와 경제적 이익을 주고 받았다.
요가 금에게 멸망당하자, 일부 타타르인들은 야율대석을 따라 사마르칸트까지 가는 긴 여정에 참여했으며 나머지는 그대로 고향에 남았다. 아무래도 영토가 금과 가깝다보니 타타르는 곧바로 금 조정에 충성을 맹세하고 요의 관인을 바쳤다. 그 대가로 금은 타타르에게 힘을 실어주고 그들을 매개로 몽골 초원의 부족들을 통제하려 했다.
이로 인해 타타르는 키야트 몽골족 최초의 칸이자 칭기즈 칸의 조상인 카불 칸 때부터 카마그 몽골 연맹과 대립했다. 카불 칸의 사촌 동생이자 후계자인 암바가이 칸은 타타르와 화해하기 위해서 자신의 딸을 타타르에 보내 결혼 동맹을 구축하려고 했지만, 금이 내려주는 은상에 눈이 먼 타타르는 오히려 딸을 직접 데리고 오는 암바가이 칸을 배신하고 금나라에 팔아 넘겼다. 이 때 금의 수도인 중도에 끌려간 암바가이 칸은 사지가 찢겨 문자 그대로 끔살당했다.
이러한 배신과 오랜 전쟁으로 인한 원한, 타타르가 금의 명을 받고 수행해 준 감정(減丁) 정책은[9] 카마그 몽골을 비롯한 몽골 초원의 유목 민족들이 타타르를 증오하게 만들었고 카마그 몽골 연맹은 원한을 갚기 위해 타타르와 자주 전쟁을 벌였다.
여기에 타타르가 부족장인 예수게이를 죽인 것까지 더해져 타타르는 카마그 몽골의 철천지 원수가 되었고 예수게이의 후계자인 테무진은 타타르에 복수하고 부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천천히 세력을 모았다.
예수게이를 죽여 카마그 몽골 연맹을 약화시킨 타타르는 초원의 패권을 차지하는 듯 했으나, 후원 세력인 금과의 관계가 파탄나는 바람에 금의 지원이 끊기고 생존을 위해 금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크게 패퇴하고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아챈 칭기즈 칸은 타타르를 급습해 수레바퀴보다 키가 큰 남자들은 학살하고 여자와 어린이를 비롯한 생존자들은 완전히 흡수해서 자기 세력 안으로 편입시켰다.
협의의 타타르족은 칭기즈 칸에 의해서 수레바퀴보다 키 큰 남자는 모두 절멸당하고 여자들과 아이들만 남았고 살아있는 남자들조차 몽골에 흡수당해서 사라졌다.
몽골인들은 러시아 인들에게 타타르인으로 불리운다. 타타르는 원래 몽골의 한 부족을 가리켰지만 몽골이 확대됨에 따라 러시아 사료에 나오는 타타르인들은 언어학적이나 민족적으로 투르크인들이었다.
그들은 1223년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러시아인들과 폴로베츠인들을 격파하고는 동쪽 스텝지대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는 1237년부터 1240년까지 러시아를 공격하여 완전히 굴복시켰고 몇세기에 걸쳐서 러시아를 통치했다.
몽골-타타르의 멍에는 1240년부터 1480년까지 루스 지역이 킵차크 칸국에게 지배를 받던 기간을 말한다. 간단하게 줄여서 몽골의 멍에, 혹은 타타르의 멍에라고도 한다.
루스 지역을 정복하고 착취했던 것은 몽골인데 왜 타타르까지 포함해서 몽골-타타르의 멍에라고 하냐면 원래 타타르란 광의론 튀르크족에 대한 멸칭이었다. 당시 킵차크 칸국의 지배층의 경우 왕족은 소수의 몽골인이고 그 밑의 귀족계급이 이들 타타르인어서 러시아인들의 입장에선 몽골인들보다는 실제 통치 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타타르인이 훨씬 무서운 존재였다.
더구나 이후 서쪽으로 퍼져나간 몽골인들도 문화적으로 이슬람화, 투르크화 되고, 인종적으로도 완전히 뒤섞이면서 킵차크 칸국은 나중에는 사실상 투르크-타타르 국가가 되고만다.
여기서 멍에라는 말은 칸국의 지배 당시 러시아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말이다.
이 말의 최초 용례는 1479년 폴란드의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Jan Długosz)[1]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타타르의 멍에'라는 말은 이보다 약 1세기 이후인 1575년 다니엘 프린츠에 의해 사용되었고, '몽골-타타르의 멍에'라는 말은 1817년 크루제가 사용한 이후 러시아로 번역되어 널리 퍼졌다.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동장군이 지켜주는 겨울의 러시아를 정복한 전무후무한 외세라고 일컫기도 한다. 실제로 몽골의 러시아 정복은 겨울에 이루어졌는데, 이는 러시아의 악명높은 라스푸티차 때문에 기마병들이 활약하기엔 오히려 겨울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몽골의 추위도 러시아 못지 않게 장난 아니기 때문에 몽골인 뿐만 아니라 말도 추위에 매우 익숙했던 점이 정복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꼽힌다.
몽골-타타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스웨덴 왕국, 프랑스 제국, 나치 독일 등 수많은 외적을 막아낸 러시아인들이 유일하게 막지 못한 외세였다. 몽골-타타르의 시대를 거쳐 러시아인들은 동슬라브계의 혈통에 아시아 몽골계·튀르크계 혈통이 섞이면서 유라시아적인 체질과 문화를 가지게 되었다. 키예프 대공국으로 대표되는 유럽식 정치체제에서 아시아의 전제군주정 국가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유럽식 정치체제를 유지한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낙후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으나, 반대로 유라시아의 광활한 영토를 러시아가 차지할 수 있는 토대를 몽골-타타르가 마련해준 셈이기도 하다.
몽골-타타르의 지배 기간 동안 거의 모든 루스의 대공들은 킵차크 칸국의 수도 사라이를 의무적으로 왕래해야 했고, 자신의 대공직을 인정해주는 대칸의 야를릭이라는 윤허장을 얻어내야만 했다. 이 블라디미르 대공의 직위를 얻기 위해 모스크바 공과 트베리 공이 서로 치졸하게 경쟁하기도 하였다.
대공직을 얻기 위한 루스 공들 사이의 경쟁과 투쟁은 대칸에 대한 종속을 더욱 강화시켜주었고, 루스의 백성들은 지도자들의 권력투쟁에 불신과 환멸을 느끼면서 동시에 교회의 권위를 높여주는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이러한 치졸한 경쟁은 이반 1세 시기를 기점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마침내 1395년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일어나 세력을 키워가던 티무르 제국의 침공을 받아 수도 사라이가 잿더미로 변하면서, 킵차크 한국은 급격한 쇠퇴를 겪고 루스에 대한 지배력도 상실해갔으며, 기존 루스 공국들을 통합한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 이반 3세에 의해 킵차크 칸국이 1502년에 멸망하면서 타타르의 멍에는 종결되었다.
▣모스크바 대공국
원래 모스크바는 류리크 왕조 출신이 다스리는 루스 공국인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전신인 로스토프-수즈달 공국의 유리 돌고루키가 1147년에 세운 도시였으며, 한 동안은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영토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 1263년 류리크 왕조 출신의 왕족이었던 다닐 알렉산드로비치가 모스크바 지역을 영지로 획득하였고, 1283년에 자신의 영지인 모스크바를 수도로 정함으로서 모스크바 공국이 건국되었다. 루스 공국들 중에서도 늦게 형성된 모스크바 공국은 14세기 무렵에 대공국으로 격상되었으며, 15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영토 확장을 시작하였다.
이반 3세는 1478년에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합병하는 등의 팽창 정책을 펼치는 동시에 1480년에는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1485년에는 트베리 대공국을 합병하였고 1490년 대에는 속령의 봉건 제후들을 숙청하는 등 중앙집권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1510년에는 바실리 3세가 프스코프 공화국을 합병하여 발트 해 부근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1521년에는 랴잔 대공국을 합병하는 등 분열된 여러 루스 공국들을 전체 통일했다. 이반 4세 때부터 대공 대신 차르를 군주의 칭호로 사용하면서 모스크바 대공국은 러시아 차르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키예프 루스
키예프 루스는 882년부터 1240년까지 오늘날 동유럽 지역의 키예프를 중심으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일대에 존재하던 루스인들의 국가이다.
12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키예프 루스는 노브고로드 공화국, 폴라츠크 공국, 블라디미르 대공국, 랴잔 대공국, 갈리치아-볼히니아, 스몰렌스크 대공국, 페레야슬라우 공국, 체르니히우 공국 등의 류리크 왕조 출신의 제후들이 다스리는 여러 공국들로 분열되어 난립하면서 사실상 이름만 남은 상태가 되며 1237년부터는 킵차크 칸국의 침공이 시작되면서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루스 공국들이 킵차크 칸국에 점령되었으며, 결국 1240년에 수도인 키예프가 함락되면서 키예프 루스는 멸망하였다.
※라스푸티차(영어: rasputitsa)는 비나 눈의 융해으로 인해 진흙이 생겨 겨울이 되기 전, 그리고 비포장도로에서 해빙기 여행을 하기가 어려워지는데, 이렇게 1년에 두 번 볼 수 있는 현상이자 러시아어 용어이다. 즉, 봄과 가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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