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거의 한 세기에 걸쳐 인도의 영토를 조금씩 정복해 갔다. 특기할 점은 영국은 처음부터 인도 전체를 정복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전쟁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어쨌든 1757년 플라시 전투를 통해 인도 영토를 처음으로 지배하게 된 영국은 마라타, 마이소르 등의 인도 내 왕국들과 전쟁을 치르며 속국과 직할령을 넓혀 갔고, 마라타 왕국을 복속시킨 1820년대가 되면 아대륙의 대부분이 영국의 직, 간접적인 통치 아래에 놓였다. 독특하게도 원래 영국령 인도는 영국 정부가 직접 다스리지 않고 영국 동인도 회사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개 회사가 오늘날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에 해당하는 영토를 다스리고 수십만 명의 자체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857년 세포이 반란으로 영국 정부는 동인도 회사를 해체시키고 인도를 영국 정부의 직할령으로 전환시켰다. 1876년에는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에 해당하는 영토를 묶어 "인도 제국"이라는 명칭을 붙였고, 황제 자리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겸임했다.
영국령 인도는 영토 규모가 영국 본토의 수십 배에 달했고, 인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거대한 영토를 영국이 온전히 통치하기란 불가능했고, 따라서 영국령 인도의 절반 가량은 영국의 직할령이 아닌 번왕국(Princely State)이었다. 번왕국은 쉽게 말해 영국의 속국이라 봐도 되는데, 해당 군주들은 영국의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내치에서 광범위한 자율성을 보장받았고 영국의 보호 아래 재산과 지위 역시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나름 유연한 통치 방식을 펼친 덕분에 동인도 회사는 한정된 자원과 병력만을 가지고 인도 전역을 정복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인도의 주요 국가들 중 영국에 격렬하게 저항한 나라는 마라타와 마이소르 정도밖에 없었고, 많은 군주들은 자신들의 부와 지위를 유지하는 대가로 영국의 통치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1764년 벵골, 비하르 지방: 1757년 플라시 전투를 통해 꼭두각시 군주 미르 카심을 벵골 태수에 앉히는 데 성공한 영국은 1764년 북사르 전투에서 벵골-아와드-무굴 연합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무굴 황제 샤 알람 2세는 영국을 몰아낼 힘이 없었고, 1765년 알라하바드 조약을 통해 영국의 벵골, 비하르 징세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벵골과 비하르 지방은 인구가 2천만 명이 넘을 정도로 부유했으며, 영국은 이곳을 인도 정복을 위한 발판으로 쓸 수 있었다.
1766년 북부 키르카르: 7년 전쟁 당시 영국은 인도의 패권을 놓고 프랑스와 겨루었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 결과로 영국은 프랑스령 마술리파탐과 프랑스의 영향권이었던 북부 키르카르 지방을 합병하게 되었다. 영국은 1765년 알라하바드 조약에서 벵골, 비하르뿐만 아니라 북부 키르카르의 지배권도 무굴 황제로부터 인정받았으며, 1766년에는 하이데라바드 왕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이곳의 지배권을 굳혔다
※마라타-마이소르 전쟁(Maratha-Mysore War)은 1785년 2월부터 1787년 4월까지 벌어진 마라타 제국-하이데라바드 번왕국 연합 세력과 마이소르 왕국 간의 전쟁이다. 1780년부터 1784년까지 치러졌던 제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 이후 마라타 제국과 하이데라바드 번왕국은 동맹을 맺고 양쪽 모두가 마이소르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 하고 있었다. 마이소르의 군주 티푸 술탄은 이를 감지하고, 마라타 측의 공세를 차단하기 위해 이들과의 전쟁에 나섰다. 마라타 제국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개입을 이끌어내려 했으나, 당시 총독이었던 찰스 콘월리스는 중립으로 일관하였다.
전황은 일진일퇴를 거듭하였고, 전쟁은 2년 남짓 지속되다가 1787년 4월 가젠드라가드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양측 모두 약간의 영토상 이득을 보았으며, 마이소르는 마라타에 단발성 공물을 바쳤다.
※마라타-마이소르 전쟁(Maratha-Mysore War)은 1785년 2월부터 1787년 4월까지 벌어진 마라타 제국-하이데라바드 번왕국 연합 세력과 마이소르 왕국 간의 전쟁이다.
1780년부터 1784년까지 치러졌던 제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 이후 마라타 제국과 하이데라바드 번왕국은 동맹을 맺고 양쪽 모두가 마이소르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 하고 있었다. 마이소르의 군주 티푸 술탄은 이를 감지하고, 마라타 측의 공세를 차단하기 위해 이들과의 전쟁에 나섰다. 마라타 제국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개입을 이끌어내려 했으나, 당시 총독이었던 찰스 콘월리스는 중립으로 일관하였다.
전황은 일진일퇴를 거듭하였고, 전쟁은 2년 남짓 지속되다가 1787년 4월 가젠드라가드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양측 모두 약간의 영토상 이득을 보았으며, 마이소르는 마라타에 단발성 공물을 바쳤다.
▣제1차(1767∼1769), 제2차(1780∼1784) 전쟁에서는 영국 패배
▣3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으로 인한 영토 변화. 붉은색이 전쟁 이전의 영국 영토이며, 붉은색 체크 무늬가 칠해진 지역이 전쟁으로 영국이 빼앗은 지역이다.
1792년 말라바르, 딘디굴, 살렘 합병: 마이소르 왕국은 인도 남부의 이슬람 국가로, 당시 군주는 티푸 술탄이었다. 마이소르 왕국은 남인도 지역의 강자로서 마라타 왕국, 영국, 하이데라바드 왕국 등에 맞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심지어 영국과의 전투에서 로켓을 이용해 대승을 거둔 적도 있었을 정도다. 그러나 주변의 강국들인 마라타 왕국, 하이데라바드 왕국, 영국 모두와 전쟁을 벌이면서 마이소르는 일종의 공동의 적 취급을 받았다. 1792년 영국은 마라타, 하이데라바드와 연합하여 마이소르 왕국을 공격했고, 끝내 수도 세링가파탐을 포위하고 유리한 조건에서 평화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전쟁의 결과로 마이소르 왕국은 영토의 상당 부분을 하이데라바드, 마라타, 영국에 할양해야 했다.
1798년 하이데라바드 왕국 속국화: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중부 인도에 위치한 거대한 왕국이었다. 이들은 영국의 힘을 빌려 북부의 마라타 왕국과 남부의 마이소르 왕국에 맞섰고, 그 결과 하이데라바드의 영토에는 영국군이 주둔하는 등 점차 영국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갔다. 1798년 하이데라바드의 니잠(왕) 알리 칸은 영국과 보호 조약을 체결했고, 최초로 영국의 번왕국(Princely State)으로 인정받았다. 이에 따라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영국에 종속되었으나 대내적으로는 자치권을 보유하게 되었다.
▣4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으로 인한 영토 변화. 붉은색이 전쟁 이전의 영국 영토이며, 붉은색 체크무늬가 칠해진 지역이 전쟁으로 영국이 새로 합병한 지역이다.
1799년 마이소르 속국화, 마이소르 영토 절반 합병: 1799년 마이소르와의 4번째 전쟁을 통해 영국은 드디어 인도 남부에서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던 국가를 복속시켰다. 영국은 마이소르의 수도 세링가파탐을 점령하고 티푸 술탄을 전사시켰으며, 마이소르 왕국의 영토는 갈가리 찢겨 절반 가량은 영국의 직할령이 되고 일부는 하이데라바드 왕국에 합병되었다. 영토가 이전보다 훨씬 줄어든 마이소르 왕국은 영국의 번왕국으로 전락했다. 남인도에서 영국에 가장 강력하게 맞섰던 마이소르가 굴복하자 남인도 전체가 영국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1801년 카르나틱 합병, 오우드 영토 절반 합병: 1799년 마이소르의 수도 세링가파탐을 점령한 영국군은 인도 남동부의 카르타닉 왕국이 마이소르 왕국과 비밀리에 도움을 주고받았음을 입증하는 문서를 발견했다. 마침 1801년 카르타닉 왕국의 군주가 사망하자, 영국은 카르타닉 왕국을 합병하고 영국의 직할령으로 삼았다. 하지만 카르나틱 왕실의 칭호는 유지시켜 주었고, 일정한 수입을 보장해 줌으로써 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즈음 아서 웰즐리 경은 인도 국가들 간의 분쟁을 종식시킨다는 명목으로 몇 가지 조건들(영국군을 각 인도 국가들에 주둔시키고 그 비용은 각자 부담할 것, 프랑스인 장교와 군인들을 고용하지 말 것 등)을 요구했다. 이미 영국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던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마라타 왕국은 거절했다. 한편 당시 인도 북부의 오우드 왕국은 아프간족과 마라타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를 막아낼 만한 군대가 없었다. 이때 영국은 자국 군대를 오우드 왕국에 주둔시키는 대가로 오우드 영토의 절반을 합병했다.
1802년 실론(스리랑카) 정복: 실론 섬은 1660년대부터 18세기 말까지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네덜란드는 섬의 해안 지방을 지배하고 있었고, 내륙부에는 캔디 왕국이라는 소국이 버티고 있었다. 18세기 말 프랑스의 침공으로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합병당하자 영국은 1796년 실론섬을 침공하여 손쉽게 차지했다. 1802년 아미앵 조약으로 실론은 영국의 식민지로 공인되었고, 영국은 두 차례의 전쟁을 통해 캔디 왕국을 멸망시키고 스리랑카의 내륙 지역마저 차지했다.
1803~1805년 오리사, 아마드나가르, 분델칸드, 도압, 구자라트 동부 등 정복: 19세기 초 인도에서 영국에 맞설 만한 유일한 강대국은 마라타 왕국이었다. 마라타는 힌두교를 신봉하는 국가로서, 인도 마하슈트라 지방에서 발흥했다. 18세기 중반에는 인도 중부, 북부 대부분을 지배하며 인도 대륙의 최강국으로 떠오르기도 했으나, 아프간족 및 영국과의 전쟁 등으로 쇠퇴를 거듭했다. 여기에 마라타 왕국의 지배 체제는 대단히 취약하여 단일 국가라기보다는 여러 부족들의 연맹체라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였다. 당시 마라타 왕국은 페샤와(명목상 군주), 신디아, 홀카르, 본슬라 등의 세력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내분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1802년에는 페샤와 바지라오 2세와 신디아의 연합군이 홀카르에 패배하여 바지라오 2세가 도주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바지라오 2세는 영국 측을 찾아갔고, 굴욕적이게도 자신을 왕위에 복귀시켜 준다면 영국이 1801년에 요구한 조건을 수용하고 영토를 할양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당연히 다른 마라타 부족들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영국은 마라타 왕국을 전면 침공함으로써 대응했다. 마라타 부족들은 맹렬히 저항했으나 영국군의 상대도 되지 않았고, 결국 마라타 부족들은 1803년부터 1805년 사이에 차례차례 복속당했다. 패전의 결과로 동부의 본슬라 부족은 오리사 지방을, 북부 신디아 부족은 분델칸드, 도압, 구자라트 동부, 아마드나가르 등의 지역을 영국에 빼앗겼다.
1818년 마라타 왕국 멸망, 인도 북부 지역 합병, 라지푸트 속국화: 1805년 2차 전쟁의 패전으로 마라타 왕국은 사실상 식물 인간 상태가 되었다. 영국은 마라타 왕국의 내분을 교묘하게 이용했고, 각 부족들은 서로 단결하기는 커녕 서로 싸우는 데 여념이 없었다. 1817년 마라타 왕국은 영국과 세 번째 전쟁을 치렀으나 패배했다. 영국은 마라타 왕국을 속국으로 만드는 대신 아예 멸망시켰다. 마라타 왕국의 옛 영토는 잘게 쪼개져서 일부는 영국의 직할령이 되었고, 일부는 번왕국이 되었다. 마라타 왕국의 멸망으로 인해 인도에서는 영국에 맞설 만한 국가가 사라졌으며, 오늘날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영토 대부분이 영국의 직, 간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또한 이제까지 마라타 왕국에게 조공을 바치던 인도 동북부의 라지푸트 부족들도 큰 저항 없이 영국의 번왕국이 되었다. 영국은 이제 서쪽의 파키스탄과 동쪽의 미얀마 지역으로 영토를 팽창하기 시작했다.
1826년~1830년대 아삼 정복: 인도와 방글라데시 지역을 정복한 영국은 서쪽으로 뻗어 나가던 버마 왕국과 국경선을 맞대게 되었다. 당시 버마 왕국은 인도 동부의 아삼, 마니푸르 지방으로 팽창하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생긴 피난민들은 영국령 벵골로 도주한 뒤 버마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쳤다. 버마군은 이를 소탕하기 위해 영국령 벵골로 진입했고, 이는 양국 간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저 당시 동남아시아에서는 국경선이라는 개념이 불명확했다고 한다). 영국과 버마 간의 1차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버마는 아삼과 마니푸르 등 인도 동부 지역을 포기해야 했다. 영국은 이후 1820년대 후반~1830년대를 거치며 인도 동부 지역의 소왕국들을 서서히 정복해 나갔다.
1843년 신드 정복: 신드는 오늘날 파키스탄의 남부 지역에 해당한다. 이곳에는 발로치 부족들이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거주하고 있었다. 영국은 1843년 이 지역을 침공하여 어렵지 않게 정복했고, 직할령에 편입시켰다.
1846년 잠무와 카슈미르 속국화: 시크 왕국은 인도 서북부의 펀자브 지방(오늘날 파키스탄)에 위치한 국가였다. 시크 왕국은 무슬림, 힌두교가 대부분인 인도에서 드물게 시크교를 국교로 삼은 국가로, 란지트 싱의 통치 시기에는 영국과 협조적인 관계였다. 그러나 란지트 싱 사후 영국과의 관계가 약화되었고, 급기야 1845년에는 영국과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물론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영국은 시크 왕국의 북부 지역을 합병했다. 동시에 시크 왕국의 영토인 카슈미르 지방을 잠무의 영주 굴랍 싱에게 강제로 판매하게 했고, 이렇게 탄생한 잠무와 카슈미르를 영국의 번왕국으로 만들었다.
1849년 펀자브 정복: 시크 왕국은 1차 전쟁에서 패한 후 영국에 대해 극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1848년 영국군 장교가 시크 왕국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 물탄을 방문하자 시크교도들은 그를 살해하고, 영국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영국은 신속하게 군대를 파견했고, 1849년 몇 차례 전투에서 시크군을 격파한 영국은 펀자브 전체를 정복했다. 이로써 시크 왕국은 멸망했고, 오늘날 파키스탄 영토의 대부분이 영국령이 되었다.
1877년 발루치스탄 정복: 발루치스탄은 오늘날 파키스탄 남서부 지역으로, 메마른 사막 지역이며 강력한 정치 체제가 들어서지 않은 채 여러 부족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영국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이 지역을 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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