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위구르족 역사와 기원(토하라인)

frog.ko 2020. 11. 29. 01:51

위구르는 중앙아시아의 튀르키스탄 동부에 타림 분지를 중심으로 거주하는 이슬람교를 믿는 튀르크 계통의 민족으로서, 우즈베크어와 밀접한 관계이 있는 위구르어를 사용하는 민족을 지칭한다.

 

오늘날의 위구르인들은 고대 중앙아시아 타림 분지 일대에 정착한 백인종 토하라인과 몽골 초원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튀르크인 및 중세 위구르인 등의 후손으로서 다양한 역사적 배경을 거쳤으며,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 민족이기도 하다.

 

이러한 배경을 반영하던 위구르 문화는 동양과 서양 문화, 유목민 문화와 정주민 문화를 다양하게 아우르는 특성을 지닌다.

 

위구르인들의 기원이 된 중세 위구르 제국의 위구르 유목민들은 황인이었지만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언어를 쓰는 백인계통의 종족인 토하라인 및 소그드인, 샤카족과 오랜 기간 통혼한 연유로 황백혼혈 민족으로 손꼽힌다. 완전히 백인의 외모를 한 터키인에 비하면 훨씬 더 동아시아적인 면이 많이 보인다. 쉽게 말해 중동과 동양이 섞여 보이는 외모라 말할 수도 있다.

 

지역별로도 외양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인데, 타지키스탄과 가까운 카슈가르의 위구르인들의 경우 백인 외양이 강하고, 하미(쿠물) 일대와 우루무치 일대, 투루판 일대의 위구르인들은 카자흐계나 키르기스계 조상을 둔 경우가 많아서 외양에서 동양인의 특징이 더 강한 편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대표적인 수도격인 도시가 오늘날에는 우루무치이지만 위구르인 대다수가 카슈가르와 호탄 출신이고 옛부터 위구르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부와 남부는 타지키스탄이나 키르기스스탄과 연결되어 있다.

 

위구르인들의 외모는 우즈벡인과 비슷한 사람도 많고 위구르인과 우즈벡인 간의 문화와 언어가 흡사한 편이다. 역사적으로 카라한 칸국이나 차가타이 칸국 등은 우즈베키스탄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위구르 역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위구르인을 우즈벡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즈베크인들은 지리적인 이유로 소그드-타지크 문화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으며, 대조적으로 위구르인들은 몽골의 영향을 훨씬 직접적으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위구르족의 조상은 유목 가오처(高車, 고거)족이다. 가오체의 이름은 천막을 옮기기 위한 소가 끄는 수레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들은 바이칼호 남쪽 협곡과 예니세이 강 일대에 사는 알타이계의 유목민족이었다.

 

위구르는 중국 기록상 튀르크계 유목민들의 연맹으로서 약 6세기경 분화되었다. 본래 서돌궐이 지배하는 땅에 살았으나 서돌궐과의 충돌 후 동북방 셀렝게 강 유역으로 이주한 뒤, 이후 꾸준한 돌궐제국의 적국으로 상대하였으나 번번히 패퇴하였고 돌궐제국의 토벌에 못 이겨 일시적으로 당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가기도 했다.

 

당나라, 설연타와 연합해 동돌궐을 630년 멸망시켰고 이후 당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지내다가 당나라에 멸망했던 돌궐이 부활하자(돌궐 제2제국) 돌궐에 다시 복속되거나 당나라가 지배하는 하서회랑으로 도주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740년대에 돌궐 제2제국이 내분으로 혼란에 빠지자 바스밀, 카를룩 부족과 연합해 돌궐을 무너트리고, 위구르의 수령 쿠틀룩 보일라가 쿠틀룩 빌게 퀼 카간으로 즉위해 위구르 제국(744년)을 건국한다.

위구르 제국은 카스피 해 유역에서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점유했으나 키르기스족에 의해 840년 멸망했다. 

 

그러나 키르기스족도 위구르 제국을 대체할 만한 제국을 세우지는 못했고 많은 위구르 유민들은 원 거주지인 몽골 고원 지방에서 간쑤, 신장, 톈산 산맥 서쪽 추이 강 유역으로 대이주하여 천산 위구르(고창회골)를 세웠으며 타림 분지 현지에 거주하는 인도유럽어 계통 백인인 토카리아인들이랑 혼혈하여 지금의 위구르인을 형성했다.

 

 타림 분지 북쪽의 위구르인들은 천산 산맥과 이식쿨 호로 이주한 키르기스인들과 동화되었다. 티무르 제국의 붕괴 이후 오늘날 중앙아시아의 주요 민족에 해당하는 여러 튀르크계 민족들이 흥기하기 시작했다. 트란스옥시아나에는 카라한 칸국의 후예 우즈베크인, 티무르의 침략을 받고 붕괴되던 킵차크 칸국 동부 영토에는 카자흐인이 흥기하였다.

 

천산 산맥 북부에는 몽골계 오이라트 부 유목민들이 정착했다. 알탄 칸이 자신이 이끄는 할하 부족들과 함께 티베트 불교로 집단 개종하자 이웃한 오이라트인들도 그동안 믿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와 이슬람을 배교하고 티베트 불교로 집단 개종했다. 이 때부터 동투르키스탄은 톈산 산맥을 경계로 북쪽의 티베트 불교를 믿는 몽골 유목민들의 준가리아와 무슬림 농민들이 주가 되는 타림 분지로 나뉘게 되었다.

 

다만 간쑤 지방에 남은 위구르인도 있었는데 이들은 하서 위구르(하서회골)를 형성했다. 이들은 혼혈이 별로 진행되지 않았으므로 몽골로이드의 모습을 유지하였고 이들이 황색 위구르 또는 위구족이라고 불리는 유고족이다. 이리하여 위구르족의 도래와 정착으로 동투르키스탄이 형성되었다.

고초 위구르

▣고창 위구르(고창회골): 840년, 키르기스가 위구르 제국의 수도 오르두 발리크를 무너뜨려 위구르 제국이 멸망하자 위구르의 잔존세력 중 한 갈래가 원래 살던 몽골 고원에서 서진하여 투르판 분지와 천산산맥에 나라를 세웠다.

 

876년에는 둔황의 한족 군벌 정권으로부터 하미(쿠물)을 점령하여 국경을 안정화하고 무역 수입을 증대시켰다.

 

고창회골은 실크로드를 통해 얻는 무역수입과 중국에 면직물 수출을 기반으로 하여 부강한 국가를 유지하였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자 주변국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향상했다. 종교는 마니교를 대체적으로 신봉했다. 때문에 마니교가 원활하게 퍼지도록 마니교를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920년대부터는 서쪽에 이웃한 이슬람을 믿는 카라한 칸국과 잦은 전쟁을 벌였다. 카를룩의 후예인 카라한 칸국 역시 원래는 비무슬림 유목 제국으로 시작했으나 사투크 부그라 칸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후 카라한 칸국 세력을 통일함으로서 무슬림 국가가 되었다.

 

1132년, 요나라 황족 출신 야율대석이 북요를 수립했다가 멸망하자 군사를 이끌고 서진하여 중앙아시아에 세력을 펼쳐 서요를 건국했다. 야율대석은 고창회골의 왕 빌게에게 선대의 위구르족과 거란족은 우호관계였다는 내용을 강조하고 카라한 왕조를 정복하기 위해 길을 빌려 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빌게는 야율대석에 직접 찾아가 토산물 바치고 길을 빌려주었다. 이렇게 비교적 강대국인 서요에게 우호적인 자세를 취해 비록 예속되었지만, 국가의 명맥은 유지했다. 그러나, 몽골제국이 몽골 초원을 통일한 뒤 새로운 북방의 패자로 떠오르자 1209년, 고창회골은 몽골제국에 복속되었다.

 

 

카라한 칸국

▣카라한 왕조:위구르 제국이 붕괴된 후 현 동투르키스탄 지역에 거주하던 위구르인 일파가 서쪽으로 이동, 아랄해 남쪽 호레즘 지역에 인접한 서부 타림분지, 페르가나 계곡, 준가리아와 카자흐스탄 일부를 점유하면서 카슈가르를 중심으로 국가를 건설해나갔다.

 

카라는 터키어로 ‘검정’을 뜻하며 ‘귀족’을 상징한다. 역대 카라한 칸국의 군주는 ‘위세가 있는 것’을 의미하는 일레그(ileg 또는 ilig)를 붙여 일레그 한(Ilig Khan)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초창기 카라한 칸들은 두 갈래로 분열되었는데, 한 갈래는 스스로를 아르슬란 칸(사자 칸)이라고 칭했고, 또 다른 한 갈래는 부그라 칸(숫낙타 칸)이라고 칭했다. 페르시아 사료에서는 이들이 돌궐 제국을 계승했다는 뜻에서 알 카니야(칸국) 또는 알 카까니야(카간국)이라고 칭했다.

 

934년 카라한 왕조에서는 발라사군(Balāsāghūn)을 근거지로 한 부그라 가문의 사투크 부그라 칸(Satuk Bughra Khan: 920∼955)이 모든 주민과 함께 왕국 전체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960년경 천막 기준으로 200,000호에 달하는 사투크 부그라 통치하의 튀르크 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그로써 그는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을 받아들인 최초의 튀르크인이 되었다. 이 왕조는 튀르크족이 세운 최초의 이슬람 국가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카라한 칸국은 서기 1000년을 전후하여 사만 왕조를 병합하였으며 동쪽으로는 호탄 왕국을 병합하여 타림 분지 서부를 완전히 장악하였으나 카라한 조는 통치자의 계승 문제로 항상 내분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지도자가 사망할 때마다 각 지방정권 간의 항쟁이 격렬한 편이었고, 결국 11세기 초반 코칸드를 경계로 내분에 휩싸였던 카라한 왕조는 11세기 말 셀주크조(朝)에 복속당했다.

 

12세기, 요나라의 야율대석이 동쪽으로부터 거란족 유민들을 이끌고 중앙아시아로 진출, 서요를 건국하며 셀주크 투르크와 카라한 왕조의 연합군을 카트완 전투에서 격파하여 패권을 장악하자 카라한 왕조는 서요에게 복속되었다. 우스만(Uthman Ulugh Sultan: 1204~1211)이 잠시 왕조의 독립을 재건했지만, 1211년 호라즘 왕조의 알라 알 딘 무함마드(Alā al-din Muḥammad)에게 패배한 뒤 멸망하고 말았다.

8세기의 위구르 제국

토하라인:기원전 2000년경부터 9세기경까지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일대에 거주한 코카소이드계 민족으로, 인도유럽어족 계열 언어를 쓰는 민족들 중에서는 가장 동쪽에 거주한 민족이다.

 

신장 지역의 타림 분지 일대의 선주민으로 그 기원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타림분지 미라 등으로 미루어보아 꽤 오랜 옛날부터 중국의 역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민족명인 '토하라'는 알란족의 언어로 '무사'를 뜻하는 토하르(tokhar)에서 유래한 말로 기원전 2세기의 그리스 측의 기록에서 고대 그리스어로 '토카로이'라고 불린 것이 다시 로마인들에 의해 라틴어로 '토카리'라고 번역되면서 그대로 민족명으로 굳어졌다. 토하라인은 달리, 토하리인, 토카리아인으로 불린다.

 

스키타이족을 비롯한 이란계 민족과는 다른 독자적인 계열에 속하는 인도유럽인이다. 이들의 언어인 토하라어파는 인도이란어파가 속한 사템어군이 아닌 로망스어군과 켈트어파가 속한 어군인 켄툼어군에 속하며, 따라서 같은 인도유럽인 일파 중에서도 인도이란인보다는 라틴 민족이나 켈트족에 가깝다.

 

타림분지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토하라인이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인도유럽인 유목민인 월지와 동일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소그디아나의 기록이나 서방 측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월지의 사건들과 토하라인의 사건들이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흉노의 침입으로 인해 남쪽 소그디아나로 밀려났다. 소그디아나에서 대월지를 건국한 토하라인은 이후 인도로 모두 이주하여 쿠샨 왕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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