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타고는 현재 튀니지 일대에 위치해 있던 페니키아인 계열의 고대 도시로, 이 이름은 고대 로마인들이 부른 것으로서 페니키아어(語)로는 콰르트하다쉬트(새로운 도시)이며, 그리스인은 칼케돈이라 불렀다.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822년 엘리사 여왕이 카르타고를 세웠다. 동쪽 페니키아(현 레바논) 티레의 공주 엘리사는 부왕이 죽자 동생과 공동으로 나라를 통치했다고 한다. 엘리사가 곧 결혼하는데 동생이 권력을 독점하고 싶어서 매형을 암살하자, 엘리사는 티레를 떠나 서쪽 땅에서 신도시 카르타고를 건설했다. 엘리사 여왕이 그곳을 통치하는 동안 리비아의 어느 왕이 결혼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기 위해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엘리사는 로마의 건국신화 아이네이스에서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라는 명칭으로 나온다.
페니키아인들은 바다 통상에 의존하는 자들이었고,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장기간 원양항해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해안 곳곳에 1천 명 남짓 사람들을 남겨 보급기지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페니키아인들처럼 해안가에 진출하려는 그리스인들과 경쟁하는 동안 이런 일은 더욱 잦아졌고, 그 결과 지중해 전역에 두 민족이 건설한 소규모 해안정착지들이 많이 자리잡았다. 이들 중 몇몇 정착지들은 번영을 누리며 인구가 증가하여 도시국가로 발전했는데, 카르타고도 그러한 도시였다.
이들 페니키아 도시들은 모두 이들의 어머니 도시 티레에 속하였고, 어느 정도 상납금을 티레에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티레 본국은 페르시아와 같은 강력한 중동의 제국들과 싸우면서 쇠퇴했고, 마침내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멸망당했다.
티레가 멸망하자 그 역할을 시돈이라는 페니키아 도시가 대신했지만, 중동에 위치한 시돈 역시 티레와 마찬가지 이유로 외적의 침입을 자주 받아 쇠퇴하고 곧 카르타고가 그 뒤를 이었다. 카르타고는 지리적으로 지중해 서부와 동부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였으므로, 지중해 서부에 집중된 광산과 동부의 높은 문화생산품들을 교환하기에 적합하였다. 그리하여 카르타고는 번영을 누렸고, 페니키아 도시들의 맹주 역할을 하면서 이들로부터 받는 상납금도 국고에 들어오자 지중해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로마가 지중해에 관심을 두기 직전까지 지중해 일대에서 최강의 해상국가는 카르타고였다. 당시 카르타고인들은 지중해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심지어는 대서양 연안으로 진출해 남쪽으로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서해안까지, 북쪽으로는 영국의 도버 해협까지 이동하며 교역했다는 설이 있다. 기원전 218년에 카르타고는 이베리아 반도의 발레아레스 제도, 사르데냐 섬, 시칠리아 섬의 서부, 북아프리카의 해상과 해안 대부분을 차지했다.
기원전 5세기 초반 카르타고는 서지중해 일대의 교역 중심지로 변모한다. 카르타고는 하드루메툼, 우티카, 케르코우아네 등 옛 페니키아 식민지의 영토와 리비아의 해안지대를 정복, 현재의 모로코부터 이집트의 해안지대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며, 지중해 내의 사르데냐, 몰타, 발레아레스 제도, 시칠리아 서편에까지 지배권을 확립했다.
서부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카르타고는 계속해서 서방을 향하여 판도를 넓혀 갔으며, 시칠리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약 3세기에 걸쳐 그리스인과 충돌을 계속하였다. 기원전 6세기에는 에트루리아인과 동맹을 맺어 그리스인과 충돌하였고, 기원전 540년경에는 코르시카섬에서 퍼카이아인과 싸웠으며, 기원전 480년에는 시칠리아 히메라 전투에서 시라쿠사의 겔론에게 패하였다.
국력의 재건을 도모한 카르타고는 기원전 5세기 후반에서 기원전 4세기 중엽에 걸쳐 시라쿠사의 참주(僭主) 디오니시오스와 싸움을 벌였다. 기원전 4세기 중엽, 시라쿠사의 티모레온과의 싸움에서는 패배하였고, 기원전 310년에는 아가토클레스에게 아프리카 본토가 침공되어 카르타고가 포위되었으나 이를 격퇴하고 아가토클레스 사후에 마침내 시칠리아의 패권을 재차 확립하였다.
그러나 그 후 에페이로스 왕 피로스의 개입으로 결국 시칠리아에 대한 완전 지배권을 잃게 되었다. 시칠리아에 대한 주도권 다툼으로 로마와 포에니 전쟁에서 싸우게 된다.
기원전 264년 일어난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를 주 무대로 싸웠으며,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가 참전했다.
기원전 218년 시작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한니발 바르카가 로마의 여러 군단을 패퇴시켜 전쟁을 승리 직전까지 이끌었으나, 카르타고 본국과 한니발의 동생들이 운영하던 이베리아 식민지가 로마군에 함락되어 결국 패배했다.
이 전쟁으로 카르타고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로마에 물어주고 지중해 서부의 재해권과 이권을 로마에 빼앗기고 말았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149년에서 146년에 일어났다. 제2차 포에니 전쟁 후 로마와 사실상 군신관계에 있던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락없이 동맹국 누미디아를 침범하여 성난 로마 원로원을 정적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제거한 강경파 대 카토가 "카르타고를 반드시 섬멸해야 합니다."라고 선동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했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세번째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멸망해, 로마의 속주 중에 하나인 '속주 아프리카'로 전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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