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탕구트족의 서하

frog.ko 2021. 1. 5. 19:34

탕구트인은 한마디로 말해 삼국지에 자주 나오는 강족(羌族)에서 갈라져나온 집단이다. 강족은 오호십육국 시대 때 일시적이나마 좁은 의미의 중원을 지배했다. 이후 강족은 크게 발강(發羌)과 당항강(党項羌)으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서남쪽에 토번(티베트)을 세웠고 탕구트로도 불리는 후자가 간쑤(감숙), 산시(섬서)성 일대로 이주하여 서하(1038년~1227년)를 세웠다.

 

당나라는 탕구트족을 평하부(平夏部), 남산부(南山部), 동산부(東山部) 등으로 나누어 지배하였다. 9세기 후반 황소의 난 당시 평하부의 탁발사공(拓跋思恭)이 장안의 수복에 결정적 기여를 하여 당나라로부터 황실의 성()인 이()씨를 하사받고, 정난군(定難軍)절도사로 봉해져 은, , , , 유 등 5개 주를 하사받은 것이 하의 시초다.

 

이후 송 태조가 송나라 건국 직후 탕구트 수령 이이흥(李彝興)에게 태위 칭호를 하사했다. 이이흥은 그 보답으로 송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하지만 980년부터 탕구트에 내분이 일어났고, 982년 수령 이계봉(李繼捧)이 송나라에 5개 주를 바치며 항복했다. 하지만 그의 동생 이계천(李繼遷)은 주전파를 이끌고 하주 동부에서 저항을 이어나갔다. 이계천은 수세에 몰리자 986년 요나라에 투항하여 하국공(夏國公)에 봉해졌다. 그러다 997년 결국 이계천도 송에 복속하며 탕구트의 혼란은 일단락 되는듯 하였다.

 

수령 직을 이은 이계천의 아들 이덕명(李德明)1005년에 송의 침입을 격퇴한 후 화의를 체결하며 송 황실로부터 조()씨 성을 하사받았다. 1009년에는 송으로부터 서평왕(西平王), 요로부터 재차 하국공에 봉해졌다. 이후 그는 요, 송과 친선을 유지하며 1031, 서쪽의 위구르 족을 격파해 하서회랑(河西回廊)을 점령하며 세력을 키웠다. 그는 또한 이후 서하의 수도가 될 흥경성(興京城)을 축조하며 독립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1032, 조덕명(이덕명)이 죽고 그의 아들 조원호(이원호)가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당시 이원호의 나이는 29세였다. 그는 1038년에 조씨 성을 버리고 이씨로 성을 복구하며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수도는 영하(寧夏) 흥경부(현재의 인촨). 1041, 동등한 황제국 관계가 된 것에 반발한 송에 의해 호수천(好水川) 전투가 벌어졌는데, 송이 13천 명의 사상자를 내며 크게 패했고 정천(定川) 전투에서 갈부민이 이끄는 서하군에게 9천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한다. 이후 3년간의 전쟁 끝에 화의가 맺어졌다.

 

이 당시 송은 요와도 전쟁 중이어서 양면으로 적과 싸워야 했다. 서하와 송이 화의에 나선 까닭은 전쟁을 마친 요가 서하와 송 중에서 어느 한 편이 될 가능성을 양국 모두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서하가 화의를 제안하고 송이 동의하여 1044년 송이 서하에게 매년 공물을 보내는 대신 서하는 송의 신하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서하의 황제는 하국왕(夏國王)에 봉해졌고, 송은 매년 비단 13만 필, 5만 냥, 2만 근을 보냈다. 이원호는 또한 토번을 크게 물리치며 영토를 확장했다.

 

북송과 요가 금나라에 망한 후에는 금과도 관계를 유지했다

 

불교를 국교로 하고, 서하 문자 등 독자적인 문화를 갖춘 문명국이었지만 징기스 칸에게 패한 이후 복속되었는데, 그가 정복 사업을 벌일 때 지원군이나 물자를 내놓지 않고 버티기 놀이를 해서 화를 돋우었다. 서하에게는 다행히도 칭기즈 칸이 2차로 서하를 침공하던 중에 말에서 떨어져 진중에서 병으로 죽었으나, 그의 유언이 '서하인을 한 명도 남기지 말라' 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임시 칸에 오른 툴루이는 서하인을 모두 죽이지는 않았다. 서하인이 많이 학살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적지 않은 서하인들이 몽골에 흡수되었다. 서하의 요새 중 하나인 카라호토는 몽골이 교역상의 이유로 보존한 덕분에 서하인들은 카라호토에서 명맥을 이어나갔다. 실제로 서하 출신 장수 차간(察罕, ?~1255)은 몽골군을 이끌고 남송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후 서하인의 후손 중 일부는 안후이 성 근처에서 살다가 원이 망한 뒤에 한족에 흡수되어 소멸하였다. 카라호토에서 명맥을 이어나가던 서하인들은 1372년 명 태조 주원장의 지시로 카라호토를 침공한 풍승(馮勝)의 명나라군에 의해 멸망했다.

 

이 당시 카라호토는 소빙기에 접어들면서 주변 오아시스가 소멸하기 시작하여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때 쳐들어온 풍승은 둑을 쌓아서 카라호토로 들어가는 수로를 차단해버렸다. 결국 카라호토는 명군의 공격으로 함락되고 서하인들은 사라졌다. 사라진 서하의 탕구트인들과 가장 가까운 민족으로는 중국 쓰촨 성, 간쑤 성, 칭하이 성 등지에 사는 강족(羌族)이 있다. 다만 서하의 DNA적 특성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서하  왕조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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