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則天武后, 624년 2월 17일 ~ 705년 12월 16일)는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이자 무주(武周)의 황제이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이다.
중국 역대 황제들 중 최고령(67세)으로 제위에 오른 황제이기도 하다. 30살에 황후가 되어 80살에 죽을 때까지 무려 50여 년을 권력의 핵심 자리에 계속 있었다.
당 태종 이세민의 후궁으로 궁에 들어와서, 태종 사후 뒤를 이은 당 고종의 황후(아버지의 첩을 부인으로...)가 되었다. 이 따위 개막장 족보가 가능했던 이유는 당 황실이 원래 선비족과 한족의 혼혈이라 북방 유목 민족의 풍습에 익숙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유목 민족들 사이에서 아들이 아버지 사후에 자기 생모를 뺀 나머지 첩들을 자기 부인으로 삼는 것은 일상적인 풍속이었다.
656년 측천무후는 황태자(皇太子)였던 이충(李忠, 643년 ~ 664년)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장남 이홍을 황태자로 앉혔으나, 그 역시 곧 죽었다. 십팔사략에서는 소 숙비의 장녀 의양공주(義陽公主)와 차녀 선성공주(宣城公主)가 유폐되어 시집을 못 간 것을 이홍이 주선하여 보내겠다고 하자, 그것이 측천무후의 심기를 건드려 독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홍의 사후, 당 고종과 무후는 크게 슬퍼하며 이홍을 의종(義宗) 효경황제(孝敬皇帝)로 추존했다. 아들이 부모를 추존하는 일은 흔하지만 부모가 아들을 추존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보기 드문 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황태자가 된 뒤 과로사했다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15] 그 후 자신의 차남 이현(李賢)을 황태자로 세웠다. 십팔사략의 기록에 따르면 고종과 한국부인(무후의 언니)의 불륜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한다. 그 때문이었을까, 680년에 어머니의 숙청에 불만을 품자 폐위되고 3남 이현(李顯)이 황태자로 세워졌다. 이것이 바로 훗날의 중종이다. 이 와중에 672년 고종이 병으로 인해 정사를 보지 못하게 되자 본격적으로 대신 정치를 했으며, 675년엔 아예 수렴청정을 선언한다. 다만 이때까지도 어디까지나 최종 결재권자는 당 고종이었다.
고종이 죽은 후 황태자 이현이 중종으로 제위에 올랐으나 중종의 아내 위황후와 그녀의 친정아버지 위현정이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때 중종이 위황후의 친정 아버지 위현정을 시중으로 삼으려다가 신하들이 반대하자 홧김에 "내가 천자인데 천자 자리를 준다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라는 초대형 헛소리를 내뱉는 바람에 폐위당했다. 이 때도 무측천이 자기 아들을 나서서 자른 건 아니고, 재상 배염이 태후인 무측천에게 황제의 폐위를 먼저 거론하고 이를 추진하는 절차를 거쳤다.
무후는 4남인 상왕 이단, 즉 예종을 즉위시킨 이후 계속해서 일어나는 반대파들의 저항과 반란을 진압하고 권력을 강화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684년, 이세적의 손자인 이경업(서경업)이 일으킨 난이다.
그리하여 690년, 무후는 예종에게서 황위를 넘겨받아[19]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그래서 이 시대를 무주시대, 즉위를 무주혁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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