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스키타이의 일부로 게테족(Getae)이 정착한 이주시기에 우크라이나는 초기 슬라브족 확장 지역이기도 했다.
중세에 강대국으로 부상한 키예프 루스의 중세 국가 수립과 함께 역사에 진입했으나 12세기에 해체되었다. 14세기 중반 이후,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영토는 세 개의 외부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루스 카간국으로부터 키예프 대공국으로 이어진 우크라이나는 튀르크족·몽골족 등의 오랜 지배를 받았다.
우크라이나 역사에는 중앙아시아에서부터 건너와 동유럽을 정복한 튀르크 민족들의 관계를 빼 놓을 수 없다. 3세기부터 시작한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들의 유럽 침공과 동슬라브족 정복 그리고 이주는 5세기부터 10세기까지 사바르 카간국에 이어 아바르 카간국 그리고 하자르 카간국까지 이어진다.
동유럽 동슬라브 원주민들은 시바르 카간국에 정복당해 프랑크족들과 대립하기도 하였고 하자르 카간국의 우크라이나 초원 정복으로 인해 동슬라브 문화는 서유럽의 문화와는 조금 이질적인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하자르 카간국의 영향에 따라 동슬라브족으로서의 정체성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8세기에서 9세기에 루스 카간국이라는 고대 투르크어인 군주 칭호인 카간을 자칭하는 북게르만족 루스인의 첫 국가가 등장하였다. 그 전까지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지배했던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들이 카간을 자칭하였으나 그 지배 아래 동슬라브인들도 완전히 종속과 동화되어 동슬라브인의 정체성이 확립되었고 그 후 동슬라브인들이 카간을 자칭했다.
키예프 대공국은 10세기까지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의 영향을 받았고 이에 따라 류리크 왕조의 시조인 류리크 또한 위대한 카간이자 왕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862년경 전까지는 확실히 카간이라 칭한 루스인들이 페르시아 사서와 동, 서 로마 기록에 남아 있다. 여기에 원초연대기의 기록에서는 루스인들의 카간으로 알려진 류리크가 동슬라브족 지역에 정착하면서 류리크 왕조와 키예프 대공국이 나타나며 카간이라는 호칭보다는 크냐지 또는 벨리키 크냐지라는 호칭이 자주 쓰이게 된다.동슬라브인들은 튀르크계 카간국인 하자르 카간국의 지배하에 오랫동안 있었다. 루스인들의 첫 국가인 루스 카간국이 키예프 대공국으로 발전하였고 그 남쪽이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이다.
키예프 루스는 내부 분열과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우크라이나 땅에는 갈리치아(Galicia, Halych)와 볼히니아(Volhynia, Volodymyr-Volynskii) 두 공국이 그 뒤를 이었다.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으로 합쳐졌다 분열되고 결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의해 정복되었다.
17세기 중반에는 우크라이나 중부에 카자크 수장국이 세워져 백년 이상 러시아 차르국의 압력을 견뎠으나 결국 폴란드와 러시아에 의해 분할되었다. 그 후 18세기 후반의 폴란드 분할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중부와 동부는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고 서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합병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키예프 루스의 후손들이 하나로 모였지만, 이미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의 문화는 언어부터 많이 달라져있었다. 동부 우크라이나의 코사크인들은 러시아어를 쓰게 되고 크림 칸국의 침략과 폴란드의 압제를 러시아가 해방시켜주었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러시아의 한 부분으로 인식한 반면, 서부 우크라이나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당연히 러시아어를 쓸 일도 없고 서구식 민족주의를 배우며 러시아를 이질적으로 보게되었다. 가장 러시아의 지배를 덜 받은 갈리치아 지방(서부)은 우크라이나의 주류 교파인 정교회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라는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파가 다수를 차지한다.
러시아 영토 내에서는 우크라이나인 자체를 차별한 건 아니었지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우크라이나어에 대한 탄압이 꾸준히 이어졌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 동부의 민족주의자 상당수가 그나마 직접적인 탄압이 덜한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로 피신하여 민족주의 활동을 이어가면서 우크라이나 서부는 반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중심이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혁명 후의 혼란과 끊임 없는 전쟁 속에서 여러 차례 독립을 시도하여 1917년에 민족국가를 건설했으나, 1922년에 소비에트 연방에 강제합병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지배 하의 서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지배 하의 동부 우크라이나가 각각 독립을 선언, 1920년에는 동서 통일을 선언했으나 외부 군대의 침략으로 신생 독립국 우크라이나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결국 1922년에 서쪽은 폴란드, 동쪽은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가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령 우크라이나는 1921년~1922년, 1932년~1933년 두 차례에 걸쳐 큰 기근을 겪었다. 둘째 기근은 스탈린이 집단 농장 체제에 저항이 심했던 우크라이나에 대해 인위적으로 부른 기근으로 홀로도모르라 불린다. 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적게는 8백만 명에서 많게는 1천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1939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소비에트 연방은 폴란드를 침공, 우크라이나 서부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로 만들었다. 1941년에는 독일군과 추축군이 소비에트 연방의 적군을 쳐부수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영웅 도시'라 칭한 키예프 전투에서는 66만 여명이 넘는 소비에트 연방군이 포로로 잡혔다. 처음에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은 곧 대량 학살을 시작하여 유대인들과 우크라이나인 민간인들을 죽이거나 강제 추방하였다. 마을 전체를 태워 없애기도 하여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일의 지배가 소비에트 연방의 지배처럼 포악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전쟁 중과 독일 치하의 민간인 사망자 수는 50여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7백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갈리치아 지방에서는 폴란드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끼리 서로 집단 학살을 저지르기도 한 끔찍한 시기였다. 독일과의 전투로 소련군은 약 1천 100만 명의 사망자를 냈는데 그 가운데 270만 명이 우크라이나계였다. 우크라이나 민족은 추축국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첫 민족이 되었고(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으로 인한 피해도 매우 컸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 소비에트 연방령 우크라이나는 서쪽으로 확장되어 우크라이나인들이 사는 땅을 거의 대부분 포함하게 되었다. 1954년에는 우크라이나에 의해 러시아 본토와 단절되어 있던 크림 반도가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우애를 과시하기 위해 페레야슬라프 조약(코자크 헤티만국이 러시아 차르국의 보호를 요청)의 300주년을 맞아 우크라이나에 크림 반도를 할양한 것이다. 이는 우크라이나 독립 후 양국 간의 분쟁 소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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