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인이란 동슬라브계 우크라이나어를 쓰는 슬라브 민족을 말한다. 혈통상으로는 동슬라브족에 속하고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루신인과 매우 가깝다. 우크라이나라는 말은 근세에 생긴 어휘이며, 중세에는 루테니아인(Ruthenians)이라는 말로 더 자주 칭해졌다.우크라이나 흑토지대에서 기원한 자유민 용사 공동체 코사크로도 유명하고 미인이 많은 나라로도 유명하다.
슬라브인, 그리고 동슬라브들의 기원 지역이 우크라이나 현 영토와 상당히 겹치며 우크라이나인들은 슬라브족과 기원전부터 이곳에 정착해서 살던 선주민족인 스키타이, 사르마티아, 알란인 등 이란계-투르크계 백인 유목민족들이랑 결합하면서 형성되었다.
원래부터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그리고 벨라루스인은 키이우 대공국을 뿌리로 하는 같은 민족이었으나 13세기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키예프 대공국이 붕괴한 이후 서로 갈라졌다,
먼저 키예프 대공국의 중심부인 초르노젬 지대의 키예프 공국, 체르니고프 공국, 페레야슬라블 공국에 살던 주민과 지도자들은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키예프 대공국이 멸망하자 몽골 제국의 손미치지 않은 서쪽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으로 피난을 가고 이후 갈리치아 볼히니아 공국은 몽골 제국을 견제하려는 교황청의 도움을 얻어 루테니아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이 루테니아 왕국은 키예프 대공국 멸망 이후의 역사에서 러시아, 벨라루스와는 구분되는 우크라이나 역사의 직계 기원이 되었다.
루테니아 왕국을 중심으로 한 우크라이나인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폴란드 왕국 및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는 등 다사다난한 역사를 통해 문화적 또는 사회적으로 서유럽 또는 중유럽의 영향을 러시아보다 많이 받게 되었고 반면 러시아인은 북쪽의 삼림 지대를 중심으로 하여 중ㆍ서유럽과 교류가 없이 고립되었고 대신 북유럽, 튀르크족들로부터 혈통, 문화, 사회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벨라루스의 경우 중세 초까지 발트어족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었으나 400~800년 동안 슬라브인들이 해당 지역을 정복하면서 이들을 동화시켰다. 해당 지역에는 키예프 공국 시절 폴로츠크 공국, 투로프 공국 및 스몰렌스크 공국이 들어서고, 키예프 공국의 멸망 이후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가 되면서 발트어족 민족들과 상당한 공통점을 공유하게 되었다.
러시아인을 살펴보자면 중세 키예프 공국 스칸디나비아 사이의 교역을 책임지는 노브고로드 공국이 있었다. 키예프 공국 시절 서열 2위에 도시에 해당했던 노브고로드 공국은 주변의 발트핀어군 부족들을 정복하고 동화시키며 확장하였으며 키예프 공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번영을 지속하였다. 한편 북부 내륙지역의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과 랴잔 공국에서 살던 주민과 지도자들이 키예프 대공국의 멸망 이후 몽골 제국에 항복을 해서 자치를 하면서도 몽골 제국의 간섭을 받는 속국인 모스크바, 랴잔, 츠베르 공국을 세우고 기존부터 키예프 대공국의 변방에 살던 핀족 또는 우랄어족과 통혼을 하는 등 이들과 동화되었고 세력을 키워 노브고로드 공국을 합병하면서 이들이 현재의 러시아인들의 조상이 되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우랄계 민족들 외에도 카심 칸국, 카잔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을 차례로 합병시키며 몽골-튀르크와 시베리아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상당수의 신민들과 통혼하고 동화시키며 오늘날의 러시아인들의 직계 기원이 되었다.
우크라이나인 사이에서 러시아인과 별개의 민족 정체성이 나타낸 계기는 보흐단 흐멜니츠키 봉기 이후 러시아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부터 우크라이나 중부, 동부 일대를 차지하고 난 이후이다. 근세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인들과 러시아인들은 같은 정교회를 믿었고,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가 우크라이나인 농노들을 억압하는 상황에서 코사크들은 루스 차르국을 구원자, 해방자로 여겼다. 우크라이나인들의 바램대로 러시아의 지원으로 폴란드군이 격퇴되고 흐멜니츠키 봉기가 성공하면서 우크라이나 대부분 지역이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의 표트르 대제는 영토를 안정적으로 확보한 이후 우크라이나어 사용을 제한함과 동시에 우크라이나 코사크들에게 과도한 요역을 부과하였고, 이렇게 요역에 파견된 코사크 상당수가 현장에서 과로와 식량 부족, 러시아 관리들의 구타 등 학대로 죽어나갔다.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당시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던 코사크들 상당수가 건설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동시에 러시아 제국에서는 코사크들의 자치 공동체가 러시아 제국의 농노제 존치에 위협이 된다고 보고 이를 농노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코사크들의 반감을 샀다. 이러한 반감은 근대 민족주의와 결합되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이 스스로를 러시아인과 구별하는 다른 별개의 정체성으로 발전하였다. 비교하자면 이러한 역사적 관계가 없었던 벨라루스인들의 경우 자신들이 우크라이나인들만큼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러시아인과 구분하려 들지는 않는 편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정확히는 볼셰비키, 소비에트 러시아에 의해 완전히 만들어진 것이다. 이 과정은 1917년 혁명 직후에 시작됐으며 레닌과 그 동료들이 러시아 자신의 역사적 영토를 분할하는 가장 엉성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우크라이나인은 평균적으로 적발이나 흑발이 많은 반면, 러시아인은 모발 색이나 눈동자 색이 북유럽 혼혈 영향으로 좀 더 옅고 금발 비율이 우크라이나보다 높다. 대신 우랄어족간의 혼혈이 비교적 더 빈번했던 영향으로 이목구비는 좀 더 동양적인 경우가 적지 않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지배 하의 서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지배 하의 동부 우크라이나가 각각 독립을 선언하여, 이 두 형태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1920년에 동서 통일을 선언했으나 외부 군대의 침략으로 신생독립국 우크라이나는 오래 가지 못하였고, 결국 1922년에 서쪽은 폴란드, 동쪽은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가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에 합병된 우크라이나는 1921년-1922년 간, 1932년-1933년 간 두 차례에 걸쳐 큰 기근을 겪었다. 특히 1930년대에 일어난 둘째 기근은 스탈린이 집단 농장 체제에 저항이 심했던 우크라이나에 대해 인위적으로 부른 기근으로 홀로도모르(Holodomor)라 불린다. 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적게는 8백만여 명에서 많게는 1천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정확히는 볼셰비키, 소비에트 러시아에 의해 완전히 만들어진 것이다. 이 과정은 1917년 혁명 직후에 시작됐으며 레닌과 그 동료들이 러시아 자신의 역사적 영토를 분할하는 가장 엉성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러시아는 자신을 대러시아, 우크라이나를 소러시아, 벨라루스를 백(白)러시아로 부르며, 세 나라가 러시아 민족의 3형제라고 부른다. 1939년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하며 얻은 영토를 우크라이나에 붙여주었으며, 1940년엔 루마니아의 베사라비아를 우크라이나에 합쳤다.
우크라이나라는 민족적 개념은 폴란드와 러시아에 맞서고 탄압받으면서 성장했으므로 러시아에 대한 감정이 지역마다 매우 다를 수밖에 없다. 키예프가 있는 내륙의 서부 우크라이나와 공업도시 하르키우(제2도시, 러시아어 하리코프)와 항구도시 오데사(제3도시), 크림 반도 등이 속한 동부 우크라이나는 지지정당부터 민족, 언어 구성까지 제법 다르다. 그래서 서부 지방은 러시아에 이질감이 상당히 심한 반러시아(반러) 성향인 반면, 러시아와 붙어있는 동부 일부 지방은 러시아어를 많이 쓰고 러시아에 대한 이질감이 적은 친러시아(친러) 성향인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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