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

우리 땅에 살던 여진족 후예 "재가승"

frog.ko 2020. 10. 22. 15:25

재가승(在家僧)은 함경북도의 두만강변의 여러 마을들에서 살던 족속 집단으로 어떤 통시적 변천 과정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말은 조선 내에서 살던 특정 불교집단을 가리킨다. 불교에 능숙한 사람을 촌장으로 삼았으며 옆 마을로 다니면서 경을 읽어주는 것을 생계수단의 하나로 삼았다.

 

이들은 주로 함경북도 두만강 연안 지역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이 사는 마을들을 재가승 마을 혹은 중골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고려도경에 '재가화상'(在家和尙)이라는 집단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도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외모상으로는 한국인들과 구분되지 않았으나 일반적인 한민족과는 다른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여진족의 피가 섞인 후예로 여겨졌으며 그들 스스로도 한국인(조선인)이기는 하나 일반 한국인과 구분되는 민족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1960년대에 한민족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유래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은데 최종적으로 조선초기 두만강 유역에 살던 여진족 부족은 울량합(兀良哈, 우량하이), 울적합(兀狄哈, 우디거), 오도리(斡都里) 등이었다. 세종대왕이 여진족으로 몰아내고 이 곳에 6진을 설치했다. 울량합·오도리의 일부는 두만강 남쪽의 경원·온성·회령 등의 성밖에 살면서 조선에 귀순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이들은 차츰 조선 사람으로 동화되어 후대에 재가승으로 불렸다.

재가승들은 주로 농업 생활을 하였으며 산간에 은둔하며 화전농업을 하며 주로 귀리를 생산했다. 생산된 귀리를 이용하여 다른 세금이 면제된 대신에 초신과 귀리로 만든 황지(黃紙)를 생산하여 바쳤다.

 

장래 풍습은 원래는 화장이었으나 이후 현지 풍습을 받아들여 매장을 하였다. 마을의 절에는 따로 승려는 없지만 주민들은 불교를 바탕으로 한 생활을 하였으며 불교에 능숙한 사람을 촌장으로 뽑았다. 마을에는 엄격한 규율이 있어 방장을 뽑아 행정 업무를 맡고 도방장을 뽑아 군사 관련 업무를 맡겼다.

 

여러가지 이질적인 풍습이 존재했는데 그 중에는 연중 2번 올리는 산치성(부군치성)과 연중 4번 올리는 산제가 있었다. 결혼은 마을 사람들끼리 하였으며 외지인들이 그들과 혼인할 때에는 그들 마을에 와서 살아야 했다. 또한 특이하게 제사를 지낼 때에는 성인남자는 참여하지 않고 여자와 아이들이 지냈으며 지낼 때에는 붉은 옷을 입었다. 그들은 폐쇄적인 생활을 영위했고 외부 세계와 별다른 거래를 하지 않았으나 차츰 한민족에 동화되어 갔다.

 

재가승이 조선 사회와 적극적으로 얽히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였는데 함경북도 회령군, 종성군, 경원군, 경흥군의 여러 재가승들은 일반 한국인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존재로 인식했다.

 

1935년의 조사에 의하면 인구는 약 4천명 가량이었는데 가장 많이 분포했던 곳은 함경북도 회령군 창두면 종암동 그리고 함경북도 온성군 미포면 월파동이었다. 이들이 사는 마을은 '재가승마을' 혹은 '중골'이라 불리었으며 이들은 모두 하천인으로 대우되었다.

 

동아일보가 1935년 11월 30일자부터 4회에 걸쳐 게제한 「재가승만고」(在家僧漫考) 연재물에서 일제강점기인 1935년 함경북도 재가승 인구는 총 563호 3,323명였다. 주요 거주지는 함경북도 ▲부령군 부령면 허통동 19호 112명 ▲부령군 석막면 금강동 42호 175명 ▲회령군 팔을면 영천동 47호 285명 ▲〃 창두면 무산동 70호 421명 ▲〃 〃 풍산동 18호 126명 ▲〃 〃 영산동 10호 73명 ▲회령군 창두면 창태동 55호 385명 ▲〃 〃 종암동 92호 684명 ▲〃 〃 어운동 68호 298명 ▲회령군 벽성면 대덕동 30호 108명 ▲종성군 풍곡면 풍계동 사동 28호 154명 ▲온성군 상포면 풍판동 오제동 8호 52명 ▲〃 미포면 월파동 영월사 53호 309명 ▲〃 〃 풍교동 제봉 10호 65명 ▲〃 온성면 주원동 구암 3호 13명 ▲경흥군 상하면 송상동 보현곡 10호 63명이다. 

출처 : 아틀라스뉴스

그래픽=김현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