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명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공화국(1569년 ~ 1795년), 또는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이다.
중세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1385년 크레보 연합을 통해 동군연합을 이루었으며 1386년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의 결혼으로 야기에우워 왕조가 세워진다.
이후 동군연합은 동유럽 내 킵차크 칸국의 잔재를 일소하고 발트해 너머 동유럽으로 확장하던 튜튼 기사단국을 격파하였다. 튜튼 십자군에 맞섰던 리투아니아였지만 폴란드의 영향으로 리투아니아는 천주교로 개종했고 리투아니아어는 폴란드어 그리고 폴란드 가톨릭에 의한 라틴어와 폴란드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440년부로 야기에우워 왕조의 카지미에시 4세 제위 시기를 기점으로 폴란드의 국왕은 동시에 리투아니아의 대공으로 동시에 양국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당시에는 폴란드 의회와 리투아니아 의회가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후 루스 차르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 사이의 갈등으로 1569년 7월 1일부로 루블린 조약을 통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양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통일한다. 폴란드인 귀족과 리투아니아인 귀족들은 동등한 대우를 받았고 연방의 영토는 우크라이나 중부에서 핀란드-카렐리야까지 이어졌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황금 시대는 17세기 전반에 찾아왔다. 귀족들이 지배한 강력한 의회(세임)는 30년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보류하여 유럽 세계의 대부분이 휘말렸던 심각한 종교전쟁이란 참사로부터 자국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스웨덴, 러시아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속국들로부터 자국을 지키기 위해서 주변 여러 나라에 대한 적극적인 확대정책을 개시했다. 17세기 초두에는 동란 시대에 빠져 약체화된 러시아에 대한 몇번의 침략을 벌였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대는 1610년 9월 27일부터 1612년 11월 4일 함락될 때까지 모스크바를 점령통치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위세는 1648년 이후에 받은 2번의 충격에 의해 쇠퇴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최초의 충격은 역사적으로 가장 대규모였던 코사크 반란이었다. 동부 국경의 크레시(Kresy)에서 일어난 이 흐멜니츠키 봉기는 크림 한국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거기에 반란자가 1654년 페레야슬라프 조약을 통해 러시아의 차르에게 지원을 요구하는 사태에 이르자,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향력을 러시아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또 하나의 충격은 1655년 스웨덴에 의한 침략으로 대홍수(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17세기 중반 일련의 전역)로 알려졌다. 이 침략은 스웨덴 왕가였던 바사 왕조 출신의 선거 군주들의 스웨덴에 대한 적대 정책이 원인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17세기 후반에 들어 약체화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신성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와 동맹을 맺은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에 의해 오스만 제국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주는 데 성공했다. 1683년 빈 전투는 250년에 걸쳐 지속된 기독교 세계=유럽과 이슬람 세계=오스만 제국과의 오랜 기간 이어진 항쟁의 역사에 있어 최종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몇 세기에 걸쳐 무슬림 측의 위협은 여러 번 이어졌기 때문에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기독교 세계의 방파제(Antemurale Christianitatis (forefront of Christianity) 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뒤이어 일어난 16년에 걸친 대튀르크 전쟁(Great Turkish War)의 결과로 오스만 제국의 국경은 영구적으로 도나우 강 이남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두 번 다시 중부 유럽에 위협을 미치는 일은 없었다. 한편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있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존재감을 주변 여러 나라에 인지시키는 일은 성공했으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우선시 했기 때문에 기타 주변 여러 나라 사이와 투쟁 및 국내 문제에는 소홀히 하게 되었다. 이렇게 일시적인 공화국은 중흥은 오히려 주변 기독교 국가와의 긴장감을 초래하는 일도 빈번하게 되었다. 또 얀 3세에 의한 내정개혁은 폴란드 의회의 기능정지로 인해 소멸되고, 왕권의 약체화를 진행시키는 일이 되어, 주변 여러 나라에 의한 내정간섭의 원인이 되었다.
18세기까지 공화국은 수많은 국내 문제에 직면하고, 또한 여러 외국의 영향력에 흔들리게 되었다. 정치 시스템의 정지는 공화국을 무정부사태의 직전까지 몰아넣게 되었다. 1791년 5월 3일 헌법의 제정을 그 정점으로 4년 세임(1788년-1792년)등의 개혁의 시도는 뒷걸음치며 사라진 것이 되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주변 여러 나라였던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 3번의 영토 분할을 통해 통치되면서 모든 영토를 잃었다. 1795년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유럽의 지도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독립을 다시 손에 넣게 된 것은 1918년이었으며, 그것도 별개로 독립한 민족국가로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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