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번(吐蕃)은 티베트고원의 중앙에 성립된 고대왕국으로, 7세기 송첸캄포에서 9세기 중순 랑다르마에 이르기까지 2백여년간 지속된 티베트 지역 역사상 국력이 가장 강했던 왕조였다.
당나라는 강력해진 토번에 의해 타림분지인 서역을 잃고 토번에 조공하게 된다. 당나라는 이 시기 티베트에서 존속한 왕조를 ‘토번’이라고 불렀고, 이 명칭이 14세기 중순까지 티베트의 통칭으로 사용되었다.
토번왕조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그 원류는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정보는 확인할 길이 없다.
송첸캄포의 조상들은 라사 남동의 얄룽창포(톨기 지방)를 기점으로 삼아 근처의 여러 부족을 흡수해 세력을 늘렸다. 630년, 남리송첸 왕이 독살되고 그의 아들 송첸캄포왕(재위 630년~650년)이 즉위 한다. 633년, 송첸캄포왕은 수도를 라사로 정하고 토번 왕조를 열었다.
634년, 송첸캄포왕은 당나라를 공격해 당나라를 예속시킨다. 또한 토번의 남쪽에 위치하는 네팔의 릿체비 왕조에 사자를 보내, 브리크티 데이비(赤尊公主)를 왕비로 맞이한다. 636년 토번은 강대하여 당나라를 속국으로 삼고 당 태종의 딸을 공녀로 바칠 것을 욕구한다.
그러자 송첸감포는 20만의 군사를 일으켜서 토욕혼을 정벌하여 멸망시켰고, 겸사겸사 백란 등의 강족 마을도 공략한 후, 송주를 내놓으라고 당나라에 요구했지만 당군에 패하고 말았다. 그 후 다시 당태종에게 특사 가르통첸(재임 652~667)을 보내, 금 5천 령을 납폐로서 주었고, 당나라는 토번의 상승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641년 당태종의 조카인 문성공주를 왕비로 보냈다.
원래 문성공주는 손챈감포의 아들인 궁송궁첸에게 시집갔으나 아들이 낙마사고로 사망해 유목민의 형사취수제와 정략에 의해 시아버지랑 재혼했다.
문성공주가 ‘자면의 풍습’(얼굴에 적토를 바르는 풍습)을 싫어했기 때문에 이를 폐지하고 포탈라궁을 건립하기도 한다. 문성공주는 당나라에서 데려 온 장인들로 하여금 소소사(라모체)를 건립케 하고, 당나라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상을 모셨고, 첫 왕비인 브리크티 데이비의 조캉사원 건립을 도왔다. 문성공주가 가지고 온 신진산물은 토번의 문화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다.
647년, 바르다나조 북인도의 왕, 하르샤·바르다나(계일왕)가 죽어 혼란한 바르다나 왕조에 1천5백의 기마병을 파병해, 정권을 찬탈한 아르쥬나를 잡아 당의 사자 왕현책을 보호했다. 649년, 당 태종이 죽고 당 고종이 즉위 하면서, 토번의 황제는‘부마도위’, ‘서해군왕’의 관직을 일방적으로 받는다. 이에 태종의 영전에 15종의 금은주옥을 올리자, 당나라는 ‘빈왕’의 호칭을 더하고 예물로 화답하였다. 또 토번은 뛰어난 당의 공예기술(누에씨, 주조, 제지, 제묵)을 도입하기 위해 당나라 장인을 요청하여 파견받았다. 송챈캄포왕은 650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 후 티베트는 다른 민족들에게 중앙아시아 지역을 빼앗겼으며, 토착종교 뵌교와 외래 종교 불교 간의 대립, 불교 내의 파벌 간 다툼과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인해 조각조각 나뉜 군웅할거 시대를 맞이했다. 그리고 티베트는 분열하여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리며 주변 강국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전락했다. 이때부터 장족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몽골과 티베트의 첫 조우는 1236년인데, 당시 소규모 부족의 족장이 몽골에게 투항하고 금에게 대항하는 것으로 기록이 시작된다. 1240년, 몽골 제국은 티베트를 제압하기 위해 항복한 탕구트 계열 장군에게 30,000명의 군사를 준 뒤 티베트를 치게 했다. 하지만 몽골의 다른 전쟁들보다는 훨씬 피해가 적았다. 티베트를 완전히 흡수한 뒤 종교 지도자를 대리 통치인으로 선택해 티베트 불교 샤꺄파(홍모파)의 쌰꺄틴진을 식민 정책의 동반자로 삼았다. 홍모파의 승려 팍빠는 몽골의 파스파 문자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샤머니즘, 경교, 이슬람 등 온갖 종교가 각축을 벌이던 몽골에 티베트 불교를 전파하였다. 또한 고려와 같이 티베트는 원의 속국이긴 하였지만 자치를 하는 등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
1346년 부터 54년 사이, 몽골에 의해 세워진 원 제국이 기울어져갈 무렵, 티베트에서도 새로운 불꽃이 피기 시작한다. 티베트 불교의 또 다른 종파 까귀파의 귀족 자제 창첩 걀첸은 원나라의 약화를 통해 제국의 비호를 받던 기존 지배층이던 샤꺄빠를 물리치고 새로운 독립 티베트 왕조인 팍모두빠 왕조를 열게 된다. 동시기 세워진 명나라는, 이전의 원나라와는 달리 티베트의 조공 관계를 유지하고 관등 국사라는 작위를 내리는데 그친다.[19]
다시 독립된 중앙정부를 얻게 된 티베트는 옛 제국의 과거를 되돌리는데 힘쓰기 시작한다. 티베트 제국의 전 작위들을 다시 부활시키는가 하면 중국 학자들을 초청해 학문에 힘을 쓰기 시작한다. 또한 내치에 힘을 쓰기 시작하면서 아직까지 봉건제였던 티베트 각 지역의 유력자들을 회유해 제대로 통치하는 등, 티베트는 오랜만에 평화의 시간을 갖게 된다. 현재의 티베트 하면 떠오르는 불교, 건축, 역사 등은 다 이 독립의 시기로 부터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결국 1434년 내전이 일어나고 정권은 린풍빠라는 가문에게 돌아가며 팍모두빠 가문은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 이 린풍빠라는 가문은 또 한번 짱빠(Tsangpa)라는 가문에게 내전에서 지게 되고 짱빠 가문은 티베트의 마지막 독립 왕조로써 티베트를 지배하게 된다. 초반에는 다시 내전에 휩싸인 티베트 각 지역을 정복하는 등 탄탄대로를 걷는 행보를 보였으나 짱빠 가문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겔룩빠의 5대 달라이 라마 롭상 갸초(Lobsang Gyatso, 1617~1682)는 오이라트의 호슈트부에게 군대를 빌려 짱빠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결국 짱빠는 달라이 라마의 계략에 넘어가 수도인 라싸에서 괴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판첸 라마의 중재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티베트는 이렇게 다시 통일되었고 또한 겔룩빠는 이를 통해 정교일치체제를 구축하고 티베트의 주 종파를 겔룩빠로 만들게 된다. 티베트는 호슈트 칸국이 지배하다, 이후 준가르의 지배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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