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는 티모르 섬의 동쪽 부분에 자리잡은 공화국으로 정식 명칭은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이다. 수도는 딜리이다. 국토면적은 15,000㎢에 인구 약 132만 명이다. 필리핀과 함께 동남아시아의 둘뿐인 가톨릭 국가이다. 더불어 21세기에 독립한 최초의 나라이다.
티모르 섬의 서부 지역은 네덜란드, 동부 지역은 포르투갈의 식민 통치를 받으면서 서구인들에게 처음으로 알려졌다. 본래 하나의 섬이지만, 이쪽 동네가 대개 그렇듯 동쪽과 서쪽의 언어도 문화도 다르다. 식민지배로 인해 달라졌다는 착각이 있는데 원래 다르다! 동티모르 안에서도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공존한다. 참고로 다른 인도네시아 섬도 여러 언어와 인종, 문화 모든 게 다른 이들이 살던 곳으로 따로 살다가 네덜란드가 식민지배하면서 합쳐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1642년 포르투갈이 현재의 딜리 지역에 목재교역소를 설치한 후 티모르 섬 전체를 식민지이자 향료/목재 무역의 거점으로 삼으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힌두교, 불교와 이슬람이 근근이 전파되기는 했지만.
그러다가 17세기 이후 포르투갈이 쇠퇴하고 네덜란드가 순다 제도의 패권을 잡으면서 1859년 양국 간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의 양도로 서(西)티모르는 네덜란드가 차지하고 동(東)티모르만 포르투갈 식민지로 남았다. 오랜 세월 동안 가톨릭이 깊숙이 전파되어, 거의 이슬람교 국가에 가까운 인도네시아와는 천지 차이로 철저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이것도 티모르 분쟁의 중요한 요소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인 1941년 12월 17일 호주-네덜란드 연합군이 포르투갈령 티모르를 점령한다. 당시 총리인 안토니우 살라자르는 항의했지만 그뿐이었고 포르투갈군 수비대도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은 오히려 연합국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 제국은 원래 마카오처럼 티모르를 건드리지 않을 예정이었으나 연합국 군대가 들어온 이상 일본은 티모르를 침략하기로 결정했다. 1942년 2월 19일 일본이 포르투갈에 선전포고를 때렸으며, 일본군이 티모르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이후 호주-네덜란드 연합군은 1년 가까이 티모르 전투를 치르며 저항했으나 1942년 12월부터 호주군은 철수하기 시작했고 1943년 2월에는 일본이 승리했다. 이후 티모르는 1945년 8월 15일 패망까지 일본이 군정 지배했고 일본군이 식품을 약탈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에 저항하는 티모르인들이 무차별 학살당했다.
연합군 역시 일본군 퇴치를 위해 마구 폭격하면서 전체 티모르인 중 10여%인 40,000~70,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후 호주군이 티모르 주둔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1945년 9월 27일 포르투갈군이 전후 복구를 위한 식량과 건축 자재를 싣고 티모르인들의 환영 속에 돌아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세계의 식민지가 서구열강에게서 독립하는 흐름이 있었지만, 포르투갈의 제2공화국 정권은 이 흐름에 역행해 전세계 포르투갈 식민지들의 독립을 무력으로 틀어막았다. 당연히 식민지 이곳저곳에서 독립전쟁이 벌어졌는데, 끝이 없는 지겨운 전쟁에 염증을 낸 군대가 카네이션 혁명을 일으킨 뒤 1974년 이후 포르투갈이 전세계 모든 식민지를 사실상 포기하면서 혼란에 빠졌다. 이에 따라 동티모르 곳곳에선 독립파와 친 인도네시아파가 종교 같은 문화적 차이 등으로 각각 갈라져 내전이 벌어졌고, 같은 해에는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FRETELIN)이, 1975년 8월에는 동티모르민족해방군(FALINTIL)이 각각 결성됐다.
여기서 승리한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FRETELIN)이 독립의 주도권을 잡아 1975년 11월 28일 동티모르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독립을 주도한 FRETELIN이 공산권 좌익 계열이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베트남이 적화통일로 마무리되던 상황에 동남아시아의 공산화 위기감이 고조되어있었고, 미국-호주-인도네시아 모두 "태평양의 쿠바"가 태어나는 것을 원치 않아, 3국의 암묵적 합의 하에 1975년 12월 7일에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공해 27번째 주인 티모르티무르 주로 일방적으로 병합했다.
이후 세계적인 무관심 속에 인도네시아의 식민통치와 군정(軍政)이 이어져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1970년대 내내 70만 인구 중 무려 20만이 추방되거나 학살되는 등 엄청난 탄압을 받았으며, 질병과 기아로 죽는 주민들도 속출했다. 위와 같은 탄압 때문에 겉으로는 조용한 듯 했지만, 1981년에 사나나 구스마오가 팔린틸 총사령관이 된 이후 1992년 투옥 때까지 무장투쟁을 총지휘하며 끈질기게 저항을 시도했다.
1997년 들어 동아시아 외환위기 크리로 휘청거려 이듬해 수하르토 독재정권이 인도네시아 민중의 힘에 못 이겨 퇴진하고 인도네시아가 민주화되면서 과거처럼 억지로 탄압할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됐고 독립 열망이 고조되었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하비비 대통령이 타개책을 제시해 1999년 2월에 종신형을 살던 구스마오 전 팔린틸 사령관을 가택연금 형식으로 석방했고, 8월 30일에 열린 UN 감독하 주민투표에서 독립 찬성파가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동티모르 주민 중 인도네시아 잔류파와 인도네시아인 거류민들이 조직하고 인도네시아 군부와 연결된 '친 인도네시아 민병대'가 대량 살육 작전을 시작했다. 군의 묵인 하에 독립운동가, 기자 등을 참수하고 주민들에게 자동화기를 난사하였으며 학교, 병원 등 공공시설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였다. 연구에 따르면 당시 티모르섬의 기간시설 중 70퍼센트가 파괴되고 주민 2천여명 이상이 살해됐으며, 주민 수천명이 서티모르나 산 속 등지로 피신했다.
1999년 10월 말부터 유엔 감시하에 동티모르 임시정부가 수립돼 무정부 상황을 끝내 헌법과 국가 건설의 기틀을 다진 뒤, 2002년에 완전한 독립국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