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762

그리스 독립전쟁은 어부지리

1821년부터 1829년까지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운 그리스 독립 전쟁의 결과 런던 의정서로 신생 그리스 국가는 독립을 인정받았다. 독립 당시의 영토는 아테네 일대에 국한되었으나, 영국은 1864년 이오니아 제도를 그리스에 할양하고 1881년 테살리아 지방을, 1912년 마케도니아 및 이피로스, 1913년 크리티 섬을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하게 된다 .발칸 전쟁(1912~ 1913 까지 발칸 반도에서 일어난 전쟁, 발칸 동맹(그리스,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세르비아) 과 오스만 제국과 제2차 발칸 전쟁 1913년 6월~1913년 8월)의 결과, 그리스는 영토와 인구를 늘리는 데 성공했다.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그리스는 무스타파 케말의 터키 민족주의자들과 전쟁을 벌였고,로잔 조약으로 로잔 조약으로 두 나..

세계역사 2020.10.19

레판토 해전의 역사적 의의

지중해를 제압하고 있던 투르크가 키프로스섬을 빼앗자, 1571년 10월 7일 교황 피우스 5세는 돈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지휘하는 베네치아 ·제노바 ·에스파냐의 연합함대로 하여금 코린트만(灣)레판토 앞바다의 알리 파차가 지휘하는 투르크 함대를 공격하게 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 이후 신성 동맹은 일시적으로?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였으며,?로마를 오스만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고, 유럽을 향한 오스만의 팽창을 저지하였다. 이 전투는 15세기부터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지 않았던 오스만 군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혔다. 또한 기독교 세계의 절반에게 레판토 해전은?"기독교의 영원한 적"으로 여겨진 투르크 족의 몰락이라는 염원을 고취시켰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은 그 함선의 거의 대부분과 30,000명의 병사 거의 ..

세계역사 2020.10.19

콜롬부스 이전에 정화 원정대가 있었다

정화의 선조는 칭키스칸의 아랍 원정때 귀순해온 아랍인의 후손으로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이며 쿠빌라이의 윈난성 개발에 노력했던 사이드 아잘 샴스앗딘 이었다. 정화가 이슬람교도 출신이었던 것은 나중에 영락제가 대원정을 준비할 때 그 지휘관으로 정화를 맘에 두게 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주원장이 명나라 건국후 원나라 세력이었던 윈난성을 공격할때 소년이었던 정화(12세)는 붙잡혀 거세된 뒤 환관이 되어 당시 연왕(燕王)이었던 주체(朱?에게 헌상되었다.주원장 사후 영락제가 제위를 찬탈한 정난의 변(靖難의 變) 때 정화는 공적을 세워, 영락제로부터 정(鄭) 씨란 성을 하사받고 환관의 최고위직인 태감이 되었다. 정화는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남쪽 바다에 대한 대원정을 준비하여 1405년 6월 제1차 원정을 떠났다...

세계역사 2020.10.19

헬베티아 공화국(스위스)

정식 명칭은 헬베티아 연방(라틴어)이지만 스위스 연방이라 부르기도 한다. 스위스는 26개의 주(칸톤)로 구성된 연방 국가이다. 1291년 스위스 지역의 3인 대표가 현재의 수도 베른에 모여 자치 보존을 위해 영구 동맹을 맺은 게 스위스 연방의 기원이며, 이 동맹에 가담하는 주가 늘어났다.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1499년 스위스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고 바젤 조약에 따라 스위스는 독립을 인받았다. 이후 1815년 빈 회의에서 영구중립국이 되었고, 그 후 파리회의에서 재확인되었다. 스위스의 주는 1848년 스위스 연방이 세워질 때까지 국방과 통화를 포함한 완벽한 자치권을 보장받고 있었으며 연방이 성립된 이후에도 고유한 정치 체계와 입법권, 행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여러 칸톤은 이른바 ..

세계역사 2020.10.19

네덜란드 벨기에의 언어전쟁

유럽 대륙의 북서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수도는 브뤼셀이다.면적 30,528㎢, 인구 10,779,000(2009 추계). 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작은 국가이고 인구밀도는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한다. 1830년 독립 이래로 의회 형태의 정부를 갖춘 세습에 의한 입헌군주제를 실시하고 있다. 벨기에는 처음에는 중앙집권정부 형태였다.하지만 1980, 1990년대 플랑드르, 왈론니아, 브뤼셀 수도권 지역들로 권력을 분산하는 연방국가 형태로 변모했다.문화적인 면에서 벨기에는 서부 유럽의 로망스어와 게르만어족 사이에 있는 복합적 문화를 가진 국가이다. 나라는 동부 지역에 독일어를 사용하는 소수의 국민들을 제외하고는,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들과 네덜란드어에서 파생한 플라망어를 쓰는 사람들로 나뉜다. 왈론인이라 불리고 프랑..

민족분쟁 2020.10.19

아프리카속의 아시아! 마다가스카르

마다가스카르는 인도양에 떠 있으며 아프리카 본토의 모잠비크와 모잠비크 운하를 사이에 두고 400km 떨어져 있다. 특이점은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아시아계 말레이 인종이 대다수인 섬나라이다. 면적은 전체 면적은 587,040 km²이며 그린란드, 뉴 기니, 보르네오 다음으로 네 번째로 큰 섬이며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합친 것 같은 크기이며 주민은 말레이계 메리나족 26%, 베티미사라카족 15%, 베틸레우족 12%, 투미헤티족 7% 등이 존재한다. 마다가스카르 국민들은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의 혼혈이며, 1500년에서 2000년 전부터 마다가스카르에 살아 왔으며 주요18개 부족이 거주하고 있고, 서부연안에는 흑인도 거주하며 메리나족이 주요 부족이다. 초기의 마다가스카르인들이 자신들이 남동 아시아에서 키우던 작물..

상식 2020.10.19

아프리카의 유일의 기독교 국가

1931년 이전에는 '아비시니아'라 불렀다. 이후 고대에는 발원한 도시의 이름을 따 악숨 제국으로 불렸다. 기원전 1000년 ,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과 지혜 겨루기에서 진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메넬리크 1세가 북에티오피아로 이주하여 황제가 된 것이 에티오피아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에티오피아 고원을 중심으로 아프리카 문명 중 이집트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고유한 문자와 국가체제를 유지해 왔다. BC 10세기경 아라비아의 셈족과 원주민과의 혼혈로 이디오피아인 생성되었으며 고대 유대인의 후손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최근까지 유대교를 밎는 유대인은 1980년대까지 모두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이와같은 이유로 이스라엘에는 팔라샤 라는 이디오피아계 흑인이 있는 것이다. 기원전에 솔로몬왕과 시..

종교 2020.10.19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Homeland'

아파르트헤이트(아프리칸스어: Apartheid)는 남아프리카 백인정권에 의하여 1948년 공식화된 인종분리정책. 즉 백인정부가 흑인.백인.인도인.유색인으로 인종을 분리하여 거주지및 결혼,출입구역분리정책을 취한정책이다. 남아공 정부는 10개의 흑인국가 (반투 homeland)를 설정해 각각 특정 민족을 귀속시켰다. 1970년 모든 흑인은 지정된 홈랜드의 시민이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백인 정권은 흑인의 참정권과 시민권을 제한 하였으며 1980년대초까지 4개의 홈랜드가 반독립상태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독립지역으로 유지 되었다. 남아프리카에 10곳, 남서아프리카에 10곳이 있었다. 그러나 반투스탄 영토의 대부분은 불모의 박토(薄土)였고, 이렇다 할 경제적 기반이나 산업시설도 없어 남아프리카 경제는 반..

인종 2020.10.19

티베트

티베트는 중국과 인도의 사이에 위치해 있으나 히말라야 산맥과 티베트 고원에 둘러싸여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히말라야 산맥의 북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역의 평균 고도가 4900m가 넘어,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컬어진다. 티베트는 지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고립된 지역이다. 티벳이 역사에 기록된 시기는 7세기초에 남리루쩬(囊日論贊)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냈음이 확인된다. 티베트 최초의 통일 국가는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왕국으로서 다스린 송첸캄포(松贊干布, 581 ~ 649년)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663년 수도를 라싸로 정하고 티베트 왕조를 열었고 당 태종의 조카인 문성공주와 네팔의 공주인 브리쿠티 데비와 혼인하였다.티베트의 군대는 663년 ~ 672년에는 동북방의 칭하이와 간쑤 지방의 토..

종교 2020.10.19

동네북 볼리비아

볼리비아는 인종의 구성면에서 남미에서 원주민의 구성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다. 처음에는 페루 부왕령 소속이었으나 1776년 라플라타 부왕령이 생기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관할권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1824년 12월에 볼리바르의 지원을 받은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장군이 아야쿠초 전투에서 승리한 후, 1825년 8월 추키사카에서 정식으로 볼리비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볼리비아는 볼리바르를 기념해 나라 이름도 볼리비아로 하고 추키사카 명칭도 수크레를 기념해 수크레로 바꾸고 볼리바르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으나 볼리바르가 콜롬비아로 귀국하면서 수크레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외국인인 볼리바르와 수크레가 그란 콜롬비아에 합병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1828년 수크레 대통령은 산타크루스 장군이 ..

나라 2020.10.17